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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여행] 눈 닿는 곳마다 절경이네, 남해 보물섬

카페인1112 2011. 2. 5. 23:00

 

[남해여행] 금산 보리암과 가천 다랭이마을, 그리고 남해충렬사

 * 여행일: 2,011년 1월 22~23일(1박 2일 여행)

 

갑자기 내리는 눈발을 뒤로 하고 남해로 떠난다. 관음성지 금산 보리암과 가천다랭이마을이 보고 싶었고, 내게 익숙한 것을 잠시 잊고 싶었다. 그래서 떠나는 것! 낯선 대상으로 그리고 낯선 곳으로..

 

남해(남해도)는 한려수도의 수려한 풍광을 가장 잘 대표하고 있으니 겨울에 만나는 남쪽 바다 여행의 진수. 아름다운 자연경관 외에도 다양한 문화유적, 철마다 나는 특산물들까지 남해는 말 그대로 보물섬이다. 오래 전 하동 가면서 남해대교를 건너 남해충렬사에 잠시 참배만 하고 떠났으니 남해도는 이번이 첫 여행인 셈이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진주분기점에서 남해고속도로로 갈아타고(순천 방향) 사천휴게소를 지나 하동IC 통과. 남해 방향 한적한 시골 길을 달려 노량해협을 가로지르는 남해대교를 건난다. 하동과 남해를 잇는 660m 길이의 남해대교는 1973년 개통되어 한때 다리 자체가 명물이었던 한국 최초의 현수교. 먼저 보리암이 있는 금산에 가기 위해 남해읍을 통과해 상주 방향으로 진행. 도중 복곡주차장 입구(보리암에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곳)를 지나 상주해수욕장 인근의 상주탐방안내센터 아래 주차장(주차비 4천원)에 도착. 금산 표석 옆 들머리로 들어서 산행 출발. 정상까지 2.2km(보리암 1.9km).

 

              <금산의 관문, 쌍홍문>

 

 

남해도 남쪽에 솟은 금산(錦山)은 한려해상국립공원 안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금산 38경으로 대표되는 빼어난 암릉미와 남해의 수려한 바다 풍광이 좋은 명산. 비단()의 부드러움이 아닌 화려함을 닮았다. 게다 낙산사 홍련암, 석모도 보문사와 더불어 3대 관음성지 중 하나인 보리암이 있고 이 태조 기도터 등 여러 유적지가 있는 곳. 원래 이름은 관세음보살이 주석한다는 보타산, 이후 원효대사가 보광사라는 절을 지은 후 보광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에 금산으로 산 이름을 바꾼다.

 

태조 이성계가 관음성지인 금산에서 백일기도를 하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만일 나라를 세울 수 있으면 무엇으로 보답을 하겠느냐?고 묻는다. 꿈이 이루어지면 보답으로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겠다는 약속을 한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나서 비싼 중국 수입산 비단으로 산을 덮는 대신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산 이름을 비단 금()자를 쓴 금산으로 변경하게 된다.

 

          <대장봉 아래 보리암과 해수관음상>

 

 법당(보광전)에 들어서니 이미 기도하는 신도들이 여럿. 관음보살님께 참배하고 독경소리를 들으며 바다를 보고 있는 순백의 해수관음상으로 내려선다. 관음상 앞에 서니 앞에는 대장봉과 그 아래 자리잡은 보리암, 좌측으로는 상사바위와 기암기석들의 행렬이, 뒤를 보니 발 아래 펼쳐지는 남해 바다의 풍광. 사방으로 후련하게 펼쳐지는 조망이 발길을 잡는다.

관음상 옆에 있는 삼층석탑(유형문화재 제74)은 원효대사가 가야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후가 인도에서 갖고 왔다는 파사석(인도에서 출토된다는 돌)으로 보리암 앞에 세웠다는 전설이 있는데 건립 시기는 고려시대. 이 탑에 나침반을 대면 바늘이 제 방향을 찾지 못하고 제멋대로인데 아직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는 신비로운 석탑이다.

 

 

정상 길목에 있는 문장암(명필바위)을 지나 정상에 올라서니 커다란 명승 제39호 남해금산 정상석이 있고 그 뒤에 금산1경인 망대. 망대는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 최남단 봉수대로 사용되었으며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망대에 올라서니 사방으로 거침없는 조망이 후련하다. 보리암 주변의 기암기석들과 남해바다의 시원한 풍광이 그대로 펼쳐진다. 아름다운 보물섬 남해에서도 가장 핵심은 역시 금산. 눈 닿는 곳마다 절경이다. 말 그대로 자연이 빚은 조각품 전시장.

 

 

 

문장암을 보니 옆에 홍문을 통해 금산에 올랐다는 주세붕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한림학사 주세붕이 남해 금산이 명산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정상에 올라와 경관에 감탄 由虹門 上錦山이라는 글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주세붕은 풍기군수로 재직하면서 1543년 안향을 모신 백운동서원(후일 소수서원)을 세운 분. 이 서원이 종교적인 의식과 학문을 연마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주세붕의 글씨가 새겨진 문장암>

 

이제 하산은 갈림길의 단군성전 방향, 상사바위는 0.7km 거리. 헬기장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니 천길 절벽 위에 솟은 거대한 암봉이 눈앞에 다가온다. 이웃집 처녀를 짝사랑했던 총각의 전설이 있는 상사바위. 상사바위에서 보는 조망 역시 일품, 보리암 주변을 감싸고 잇는 기암지대가 그대로 펼쳐지고 남으로는 수려한 남해 풍광이 모습을 드러낸다. 최상의 조망. 게다 두모리 해안으로 서서히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 있어 붉은 노을이 내리고 있다. 자연의 조각품 금산 안내도를 보면서 기암들의 이름들을 확인해 본다. 금산에 오면 상사바위는 반드시 들러야 할 곳.

 

           <상사바위>

 

              <상사바위에서 보는 자연의 조각품 전시장>

 

 

4시간이 넘는 널널산행을 마치고 가까운 은모래비치 싱주해수욕장을 잠시 들러본다. 산책하는 몇 사람 외에는 한적한 해변. 곱고 매끈한 모래사장과 잔잔한 파도, 그대로 한장의 그림엽서처럼 고운 풍경이다. 하지만 바람이 제법 차다.

 

아름답지만 쓸쓸한 해변을 뒤로 하고 이국적인 풍광의 독일마을로 출발. 60년대 독일에 파송되었던 광부와 간호사들이 돌아와 독일풍의 건물을 지어 거주하고 있어 이국적인 풍광이 인상적이다. 언론에 여러 번 보도되어 한번쯤은 와보고 싶었던 곳. 늦은 시간이라 마을은 개 짖는 소리 말고는 고적하기만 한데 구경 온 사람들만 분주하게 오간다.

하지만 여기 사는 사람들과의 교감 없이, 혹은 정서를 공유하지 못하고 외관만 잠시 둘러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라도 어떤 마음으로, 어떤 분위기로 보느냐에 따라 느낌은 크게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어둠이 내리는 독일마을을 뒤로 하고 이제 잠자리를 찾아 가야 할 시간이다.

 

              <철 지난 상주해수욕장>

 

 

              <어둠이 내리는 독일마을>

 

예약한 숙소는 서면에 있는 스포츠파크 호텔, 독일마을과는 거의 반대편이다. 가는 도중 적당한 음식점을 골라 저녁을 먹으려 했는데 가다보니 그대로 숙소까지 직행이다. 시간이 늦어 호텔 입구에 있는 남해한우마을 음식점에 들어갔는데 기대 이상으로 대박, 쇠고기 맛이 끝내주는 곳. 남해 한우 맛을 제대로 본다.

 

옆자리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식당 종업원에게 주변 펜션을 소개 받는데 방 하나당 4만원이란다. 이런, 나는 호텔을 11만원에 예약했는데. 그런데 이 시간까지 숙소도 안 정하고 느긋하게 식사하는 걸 보면 대단한 배짱이다. 난 몇 년전 전남지역에 갔다가 숙소 찾아 몇 시간을 헤맨 뒤부터는 숙소부터 정하는 것이 1번 순서인데. 남해는 유명 관광지답게 펜션이나 민박집이 많아 숙소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한우마을에서 저녁을 먹고>

 

 

<다랭이마을, 겨울빛 길을 걷다>

 

다음 날 아침, 해안도로를 따라 자연과 조화를 이룬 최고의 예술품이라는 다랭이마을로 출발. 가는 길 자체가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절경이 펼쳐진다. 주변 다랭이 논밭이 여기저기 보인다. 땅은 좁고 물고기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었을 테니 지난한 삶의 표시. 그런데 지금은 그 아름다움으로 가천 다랭이마을은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입구 가천마을 안내표시를 따라 들어 서니 곡선의 다랭이논에 둘러쌓인 포근한 가천마을이 시야에 들어온다. 다랭이는 산골짜기의 비탈진 곳에 계단식으로 나 있는 좁고 긴 논배미를 말하는 것. 이 마을의 한 농부가 자기 논을 몇 번이고 세어도 한 배미가 모자랐는데 나중 집에 가려고 삿갓을 들어보니 그 아래 한 배미가 숨어 있었다는 것. 그처럼 삿갓 하나로 가릴 수 있는 작은 크기의 배미부터 300평까지 다양한 크기의 논들이 45도 경사의 비탈진 언덕에 계단식으로 펼쳐져 있다.

 

 

농토가 부족한 지난한 생활이 다랭이논을 일구게 되었고 지금은 천혜의 경관을 자랑하는 관광자원이 되었다. 남해 어디나 다랭이논을 볼 수 있지만 이곳처럼 대규모로 조성된 곳이 없어 가천다랭이 마을이 문화재청의 명승 15호로 지정된 것. 한겨울에도 해풍을 맞고 자라는 마늘과 시금치 밭의 푸른 빛이 조금 남아 있고 온통 겨울 빛. 곡선의 부드러움 속에 텅빈 들녘의 쓸쓸함이 다가온다

 

 

한적하고 포근한 마을 길을 걸어 마을 한 가운데 있는 밥무덤을 지나니 남녀를 상징하는 가천암수바위, 일명 미륵바위가 바다를 보고 서 있다. 암수바위를 내려서 해안 산책로로 내려간다. 포근한 시골 길, 게다 주변 파릇파릇한 마늘밭이 봄날 기분이다. 겨울이지만 삭막하지 않고 따스한 느낌의 겨울.

흔들다리를 건너 해안가 바위에 올라서니 파란 바다와 기암들이 어우러져 감탄을 연발하게 된다. 오래 기억하고 싶은 남해의 수려한 풍광. 흔들다리 주변에서 잠시 머물다 돌아오면서 좌판에서 톳 한 봉지를(3,000)를 사들고 다랭이마을을 나선다.

 

          <마을길을 걸어>

 

             <가천암수바위도 만나고>

 

              <마늘밭을 보며 봄을 느끼고>

 

 

              <해안 절경을 즐기다>

 

 

 

              <다시 정겨운 골목길>

 

 

 

 

가천마을을 나서 남해 방향으로 조금 가니 다랭이마을을 위에서 제대로 조망할 수 있는 다랭이쉼터가 보인다. 차를 갖고 좁은 마을 길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음) 쉼터에 주차하고 걸어 들어가면 편했을 텐데 그걸 몰랐다.

바로 아래 논에 새끼 염소 3마리가 신나게 뛰어 놀고 있어 한참 구경. 다랭이쉼터 좌판에서 시금치와 냉이 한 봉지씩 사고 출발(한 봉지 3천원). 날씨가 포근해 겨울에도 노지에서 재배하는 남해 시금치는 싱싱한 데다 맛이 달아 인기 품목. 가격이 싼 데다 맛도 좋아 적게 사온 것을 후회했다. 게다 봄을 알리는 싱그러운 냉이는 며칠 동안 밥맛이 돌게 하는 별미.

 

 

이제 남해 재래시장에서 생선 구경 좀 하고 충무공을 모신 남해충렬사에 들러 참배하고 귀경할 계획. 해안도로를 달리는데, 오밀조밀한 해안선과 푸른 바다가 어우러져 눈 닿는 곳마다 절경이다. 정말 남해는 아름다운 보물섬.

김만중 유배문학관(서포 김만중은 남해도 옆 노도에서 유배 생활)은 그냥 통과하고, 남해읍 재래시장에 들러 잠시 생선 구경하다 강정 한 봉지 사들고(5천원) 근처 식당에서 성게칼국수로 아점을 때우고, 이충무공 전몰유허지인 이락사로 출발.

 

 

충무공 전몰유허는 선조 31(1598) 노량 앞바다에서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고 전사한 순신 장군의 유해가 맨 먼저 육지에 닿은 곳. 이락사 오르는 입구에 전투가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리지 마라는 이 충무공 유언비가 보인다.

 

 

 

순천 왜교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유정과 진린에게 많은 뇌물을 주며 철수할 테니 바닷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한다. 당시 남해안 일대는 왜군이 점령하고 있던 상태. 육로로 시마즈 요시히로 군이 주둔하고 있던 사천을 지나 부산으로 철수하면 되는 것. 그런데 육로로는 그들이 노략질한 수 많은 재물과 포로들을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통제사 이순신은 그들을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 없다.

 

사천에 주둔하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고니시 철병을 지원하기 위해 남해도와 인접한 창선도에 집결했다가 하동과 남해도 사이 노량으로 진입한다. 이를 가로막은 조명 연합군. 조선군은 관음포 쪽으로 도주했던 왜군과 치열한 접전으로 왜선 200여 척을 격침시키는 대승을 거두지만 이 전투에서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게 된다. 그것으로 참혹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한 영웅에 대한 칭송과 질시까지도 그분 덕에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되었다.

 

수장이 전사한 우리 수군은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었고 왜군들은 부산 앞바다를 통해 철수하게 된다. 그것으로 임진왜란 끝.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종군 신부까지 동반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후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요시 아들인 히데요리 측 이시다 미쯔나리의 서군에 가담했고, 동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해 포로가 된다. 신앙적인 이유로 할복을 거부했던 그는 결국 참수 당했고 멸문되고 만다. 반면 임진왜란 침공 3로 대장 중 하나였던 카토 기요마사는 이에야스 편에 가담(시류에 적절하게 편승, 자기 주군이었던 히데요시 아들 히데요리 편을 들지 않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까지 차지하게 된다.

 

 

 

 

 

이락사에서 첨망대까지는 500m 거리. 시원한 소나무 숲을 걸어 정자가 있는 첨망대에 도착. 좁게 보이는 여기 관음포 앞바다 어딘가에서 해전이 있었을 게다. 잠시 관음포 앞바다를 조망하다 이제 남해충렬사로 향한다. 주변 여기저기 유자나무에 노란 열매가 그대로 달려 있다. 유자는 남해 특산물. 그런데 이미 얼었던 것이라 쓸 수가 없단다. 인건비가 비싸 제철에 수확을 하지 못한 거라고. 아깝게도

 

 

충렬사 앞 실물 크기의 거북선을 잠시 들러보고 충렬사 참배. 남해충렬사(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사적 제233)는 관음포에서 순국하신 이충무공 유해를 3개월간 안치했던 곳에 새운 사당, 충렬사 뒤에 가묘가 그대로 있다. 외삼문에 들기 전 청해루 앞에 노량 바다는 리충무공 전사하신 데라 여긔에 충렬사를 세우노라는 한글비가 있다. 그의 일생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시간, 그가 보였던 삶에 대한 올곧은 자세와 치열한 의지를 배우고 싶다.

 

           <거북선과 남해대교>

 

              <충렬사>

 

 

 

 

 

충렬사 참배를 마치고 내려와 근처 횟집에서 겨울철 별미라는 물메기탕을 맛보기로 한다. 2인분 4만원이라 둘이 먹기엔 부담스러웠는데 국물이 시원하고 살은 입에 살살 녹는 부드러운 맛. 속초에서 먹어본 얼큰한 국물과는 달리 맑게 끓여 국물이 시원하면서도 담백하다. 물메기탕으로 포식하고 식당에서 남해 특산 유자차까지 한 병(13,000) 사들고 귀경길, 12일의 알찬 보물섬 여행을 마친다.

 

              <시원하고 부드러운 물메기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