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여행] 율곡의 자취를 찾아 자운서원과 화석정(花石亭)으로
[파주여행] 자운서원과 화석정(花石亭)
- 율곡의 자취를 찾아 <2,012년 10월 3일 (수), 맑음>
조선시대, 율곡 이이와 비견될 수 있는 천재가 과연 얼마나 될까? 시문과 서화에 뛰어난 어머니(사임당 신씨)를 모신 그는 3세에 이미 글을 읽고 8세때 화석정시(花石亭詩) 10세때 경포대부를 지을 정도로 뛰어난 문장력을 과시한다. 그러니 13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9번의 과거에 장원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린 것은 당연한 일.
영남학파의 이황과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조선시대 성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1,564년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병조판서 등 주요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경세가로서의 역량을 유감 없이 발휘한다. 그처럼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이루면서 수준 높은 경세가로 평가 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자운서원>
율곡선생의 자취를 찾아 파주 법원읍으로 향한다. 자운서원을 둘러보고 서원 뒷산인 사방산 등산, 그리고 귀로에 화석정에 들를 계획. 파주 자운서원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경세가인 율곡 이이(1536~1584년)를 모신 서원. 율곡 이이는 1536년(중종 31) 외가인 강릉 오죽헌(신사임당의 고향)에서 태어나 세거지였던 파주 율곡리에서 성장한다. 율곡리(栗谷里)는 밤나무가 많은 곳으로 이이는 마을 이름을 그의 호로 정한다.
자운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자운서원(경기도 기념물 제 45호,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은 1615년(광해군 7년) 율곡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들에 의해 창건되었고 1650년(효종1년) 사액서원이 된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과 한국전쟁으로 빈터만 남았다가 1970년 복원된다.
<자운서원 입구>
율곡선생 유적지 입구를 들어서니 왼쪽에 율곡선생 신도비(율곡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로 1631년 건립)가 있고 신도비 앞을 지나면 자운서원. 서원 뒤쪽 약수터에서 사방산으로 갈 계획이니 우선 우측 율곡기념관부터 들른다. 전시물들을 둘러보고 여현문을 지나 율곡선생 묘역으로 오른다.
<기념관 내부>
율곡선생 유적지 입구를 들어서니 왼쪽에 율곡선생 신도비(율곡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로 1631년 건립, 신도비는 왕이나 높은 벼슬아치 무덤 동남쪽 길가에 세운 비석)가 있고, 신도비 앞을 지나면 자운서원. 서원 뒤쪽 약수터에서 사방산으로 갈 계획이니 우선 우측 율곡기념관부터 들른다. 전시물들을 둘러보고 여현문을 지나 율곡선생 묘역으로 오른다.
<묘역 입구 여견문>
묘역에는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 선생과 부인 노씨의 묘, 형님 부부, 누님부부. 선생의 아들 등 가족 묘 14기가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율곡선생 부부의 묘가 부모 묘소보다 위쪽에 있는데 이는 당시 자식이 입신양명 했을 때 부모보다 윗자리에 묘를 쓰는 당시 관습에 의한 것이라 한다. 이이의 부인인 곡산 노씨의 묘가 선생의 묘 위쪽에 쌍분 형태로 되어 있다. 그리고 덕수 이씨 가족묘인데 선생의 누님 부부가 같이 모셔져 있다. 당시에 딸을 아들과 같이 대우?
<율곡선생의 부모(이원수와 신사임당) 묘소>
<율곡 선생 부부 묘소>
묘역을 나와 서원으로 향한다. 자운은 율곡 선생 예장 당시 뒷산에 자색 구름이 끼었다고 해 자운산이라 불렸고 효종 원년 사액서원이 될 때 ‘자운’이란 이름의 현판이 내려진다.
서원은 제일 위쪽에 사당인 문성사(文成祠)가 있고 내삼문을 지나 유생들의 강학공간인 강인당, 그 아래 좌우로 유생들이 기거하던 기숙사 동서재가 있다. 그런데 소수서원 같은 규모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서원 규모가 크지 않다. 기숙사도 작아 유생들도 몇 명 안 되었을 것 같고.
<자운서원 외삼문인 자운문>
*외삼문은 바깥 담에 세 칸으로 세운 대문으로 실질적인 출입문이 된다.
서원의 외삼문인 자운문(紫雲門)을 들어서면 유생들의 강학 장소, 즉 학교 교실 역할을 했던 강인당이 있고 마당 좌우에 동재인 입지재와 서재인 수양재가 보인다. 모두 1997년에 세운 건물. 유생들이 기거했던 동재와 서재는 모두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강학공간인 강인당>
<서재인 수양재와 동재인 입지재>
<서원의 역사를 증명하는 보호수 느티나무>
강당 뒤 내삼문(內三門) 왼쪽에 있는 자운서원 묘정비(廟庭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7호)는 자운서원의 유래를 적은 비. 숙종 9년(1683년)에 세웠으며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당대 명필인 곡운 김수증이 예서체로 썼다고 한다.
<자운서원 묘정비>
<내삼문>
내삼문을 들어서면 가파른 계단 위에 자운서원의 배향 공간인 문성사(文成祠)가 있다.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자운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것. 사당에는 율곡 이이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고 좌우에 그의 제자들인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각각 배향하고 있다. 문성은 1,624년 인조가 내린 시호
<배향공간인 문성사>
문성사를 나와 율곡약수터 좌측에 있는 등로를 따라 오른다. 자운산을 거쳐 사방산 정상에서 주내자육원 방향으로 하산, 쇠꼴마을을 지나 다시 자운서원으로 돌아오는 코스. 2시간 반 정도 걸리는 호젓한 산책로가 이어진다.
<사방산 등로 입구인 율곡약수터>
산행을 마치고 문산 방향으로 이동, 임진강 가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으로 향한다. 율곡이 즐겨 찾았고, 임진왜란 때 그의 선견지명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는 곳. 현판 뒤에 그가 8세 때 지었다는 화석정 시가 새겨져 있다.
화석정시 (花石亭詩) / 율곡 이이 (栗谷李珥)
林亭秋已晩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드니)
騷客意無窮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 (서리 맞은 단풍은 햇볕을 향해 붉구나)
山吐孤輪月 (산 위에는 둥근 달이 떠오르고)
江含萬里風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塞鴻何處去 (변방의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고)
聲斷暮雲中 (울고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