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성지순례 여섯째 날 ①] 바이샬리(릿차비족 스투파, 대림정사)와 케사리아탑(발우탑)
성지순례 여섯째 날(11/3(일), 힌두 축제 때문에 길이 통제될 것이라며 서둘러 하루를 시작한다. 새벽 4시에 아침 먹고 4시 35분 호텔 출발. 오늘은 일정이 꽤나 긴 하루가 되겠다.
아시아에서 가장 긴 다리라는 마하트마 간디교 건너 바이샬리 갔다가 열반성지 쿠시나가르 참배하고, 국경을 넘어 부처님 탄생지 네팔 룸비니로 간다. 열반성지와 탄생지는 4대 성지이고, 바이샬리는 8대성지 중 하나.
비하르주 주도인 파트나에서 바이샬리(Vaishali)까지는 북쪽으로 60km 거리. 바이샬리는 붓다 당시 고대인도 16개 국 중 하나였던 리차비(Lichhavis)공화국 수도였으며, 불교 교단에 있어서 여러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
1) 부처님 8대성지 중 하나로 릿차비(랏차비)족이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스투파를 세운 곳.
2) 바이살리 인근의 기근을 해결한 부처님께 바쳐진 승원 대림정사가 있으며, 이곳에서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 공양을 올린 미후봉밀(원후봉밀)의 일화가 전해지는 곳.
3) 여성출가를 처음으로 허용, 비구니 승단이 최초로 생기게 된 곳.
4) 부처님이 마지막 안거를 보내면서 입멸을 예고하고 열반지인 쿠시나가르로 떠남.
5) 불교교단의 두 번째 경전 결집 장소. 이후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파됨.
6) 유마거사의 고향으로 유마경의 무대.
파트나에서 다리 건너 한참 달리다 버스가 잠시 속력을 줄였는데 마침 길가 연못에 시골 마을 힌두교 축제가 열리고 있다. 짙은 새벽 안개 속에서 여인네들이 허리 가까이 물이 잠기는 연못에 들어가 일렬횡대로 서서 일출을 기다리고 있는 것. 못 밖에는 애들이 놀고 있고 남정네들도 몇 보인다. 동 트기 전에 저수지 안에 대기하다 일출과 함께 기도를 하는가 보다.
새벽 차가운 물속에서 행해지는 저 기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했다. 인도에서 절대 약자인 여성들이 행하는 기도는 어떨까, 종교라는 게 원래 의식이 내용 못지 않게 비중이 크다 보니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도 아닐 테고, 궁금했지만 버스는 그냥 출발.
파트나에서 1시간 반 정도 걸려 바이샬리 도착, 버스에서 내리니 주변은 짙은 안개로 완전 곰탕이다. 문을 통과해 안개 속을 잠시 걸으니 파란 원형 구조물이 안개에 쌓여 있다. 둥근 지붕 아래 무슨 언덕 모양 터가 남아 있는데 오잉, 요기는 어디지?
바이샬리 릿치위족(릿차비족) 스투파 -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던 근본8탑 자리
가이드가 확성기 대고 큰 소리로 뭐라 설명을 하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아 듣기가 어렵다. 일행들한테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봐도 다들 잘 모르겠단다. 그냥 탑돌이 하는 모습을 구경하다 다시 다른 사람한테 확인 했더니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던 곳이란다.
부처님 입멸 후 진신사리를 모셨던 근본8탑 중 하나, 아하 그래서 탑돌이를 하는 구나. 그런데 부처님 사리 모셨던 곳이 왜 이리 허술할까?
부처님 열반 후 사리를 8등분 해 8곳의 스투파(근본 8탑)에 모셨는데 이곳은 리치위족(리차비족)이 사리를 봉안했던 성스러운 부처님 진신사리탑지(Budda Relic Stupa).
하지만 이곳 성지는 지진으로 무너져 오랜 기간 폐허로 남아 있었고 부처님 성지라는 것도 잊혀지고 말았다. 그런데 1,958년 이곳 유적을 발굴해 보니 예상치도 않았던 부처님 진신사리가 발견되고 근본8탑 중 하나인 것이 밝혀지게 된다.
우리는 부처님 사리 모셔다 적멸보궁 세우고 환희심으로 경배하고 난리법석인데, 정작 부처님이 태어나신 이 나라에서는 오랜기간 사리탑 있는 것도 모르고 그냥 방치해 두었던 것.
그 사리는 현재 파트나박물관에 보관중인데 발굴 당시 사리함에는 사리가 1/4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아쇼카왕이 근본 8탑 사리함을 열어 전국에 8만4천 개 스투파를 세웠다는 기록과 일치하는 것.
부처님 근본8탑이 있던 성지인데 지금은 기단만 일부 초라하게 남아 있고 지붕만 덮어 가건물처럼 볼품 없게 만들어 놓았다. 하긴 긴 세월 동안 그곳이 부처님 진신사리탑이라는 것도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이니 뭘 기대할까. 돈이 없는 가난한 나라라서? 길거리 거지만 보면 최빈국인데, 인도 부호들 씀씀이 수준은 세계 최상위권으로 자식 결혼에 200억씩 지출해 해외 토픽에 나올 정도인데 왜 돈이 없을까. 단지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대접을 못 받는 것.
그러니, 부처님 하필이면 왜 이렇게 푸대접 받는 인도에서 태어나셨나요? 아니면 열반이라도 옆에 미얀마나 태국에서 하시지요. 이 근본8탑이 미얀마에 있었다면 그들은 당장 황금사원을 세우고 온 국민이 참배하는 성지가 되었을 것.
마우리아왕조 아쇼카대왕은 근본 8탑중 꼴리족(Koliya족)이 세운 사리탑을 제외하고 7개 사리탑을 열어 인도 각지에 8만 4천개 탑을 세웠다고 한다.
콜리야족 사리탑은 탑을 헐려고 하자 꿈에 용왕이 나타나 자신보다 사리를 잘 모실 수 없으면 손대지 말라고 경고해 감히 해체하지 못 했다는 것. 그래서 그 사리탑은 훼손되지 않고 원형이 잘 보존된 유일한 스투파가 되었고 바로 네팔에 있는 랑그람 사리탑.
석가족이 세운 진신사리탑은 1,898년 발견되었는데 1,970년에 추가 조사하니 기존 발견된 사리용기보다 더 깊은 곳에서 사리와 사리함이 또 발견되어 현재 델리박물관에서 친견할 수 있다.
대림정사터의 아난다스투파와 아쇼카석주
릿차비족 진신사리탑지를 나와 아난다탑이 있는 대림정사로 간다. 부처님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모셨고 부처님 입멸 후 가섭존자 뒤를 이어 교단을 이끌었던 아난존자 사리탑과 아쇼카석주가 있고, 부처님이 이곳에 계실 때 원숭이들이 망고와 꿀을 공양했다는 미후봉밀(원후봉밀)의 일화가 전해지는 곳.
대림정사 가는 길
대림정사 가는 길. 기념품이나 자몽 파는 상점들이 있는 작은 마을 지나 조금 더 들어가니 대림정사 터. 이곳 대림정사는 붓다와 제자들을 위해 바이샬리 주민들이 마련한 사원.
규모가 큰 봉분형 아난다 스투파와 위로 솟은 아쇼카석주가 보이고, 그 옆 원숭이들이 팠다는 원숭이연못. 그리고 주변에는 중각강당 터, 마하파자파티를 비롯한 비구니들이 수행한 만자사원 터 등이 남아 있다.
바이샬리에서 열반에 든 아난존자 사리를 모신 아난다사리탑. 아난다는 부처님 시자로 부처님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모셨던 덕으로 설법을 가장 많이 들은 다문제일 제자로 불리운다. 그래서 경전의 결집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경전에서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은 바로 아난다의 기억으로 부처님의 육성을 재현한 것. 아난다는 부처님 사후 마하가섭에 이어 교단을 이끌게 된다.
인도 전통적인 스투파 양식을 보면 대부분 둥글게 벽돌로 쌓아 올렸다. 봉분형 탑은 기단이 있고 봉분에 해당되는 둥근 구조물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상륜부를 쌓았다.
아난존자탑 옆에 한마리 사자상 아쇼카석주가 있는데 북쪽 부처님 열반당을 바라보는 모습. 아쇼카 석주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었다고 한다.
바이샬리 상징, 미후봉밀 일화
바로 옆에 있는 연못은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물 공양을 하기 위해 원숭이들이 파서 바친 원숭이 연못. 커닝햄이 발굴 당시 기존 기록들을 참고해 원숭이 연못으로 확인했다고 한다.
이곳은 원숭이들이 부처님께 꿀을 공양 올린 미후봉밀의 장소. 여러 사람 발우가 함께 있었는데 원숭이가 부처님 발우를 골라 꿀을 가득 채워드렸다는 것. 그래서 원숭이가 공양 올리는 모습이 이곳 바이샬리를 상징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원숭이 연못 보면서 언뜻 든 잡념. 원숭이는 어찌 부처님한테 꿀을 공양할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뭐 법당에서 부처님께 예를 표하는 개가 있다고 TV에도 나오는 판이니 이걸 사실로 그냥 믿어야 하나?
상징일까 아니면 후세 신격화 덕분일까? 미후왕 즉 원숭이왕이 꿀을 바친 원왕봉밀이라고도 하는데, 미후왕은 바로 제천대성 손오공이 아닌가? 그럼 선계에서 훔친 천도복숭아를 공양해야지 어찌 꿀을 ㅋㅋ
이곳 대림정사는 처음으로 여성의 출가가 허용된 곳.
부처님은 출가한지 15년만에 카필라성으로 가서 아버지 정반왕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다. 그 때 부처님을 키워주었던 이모 마하프라자바티와 아내였던 야소다라 등 500명 여인들이 400km를 맨발로 걸어와 부처님께 출가를 간청한다. 부처님은 처음에는 거절. 천민인 우파리까지도 출가시킬 정도로 계급타파에 앞장섰던 부처님이지만 당시 인도사회에서 여성 수행자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것.
그러나 아난존자가 여인들도 깨달으면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으며 법에는 차별이 없다고 간청 부처님의 허락을 얻어 낸다. 실제 나중 야소다라는 부처님의 수제자들과 맞먹는 지혜를 성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일로 아난존자는 부처님께 여성출가 허용을 강요했다고 후일 남방불교권 승려들의 비판을 받게 된다.
* 남방불교권에서는 지금도 여성 출가에 대해서는 극히 보수적인 입장을 그대로 갖고 있다. 그러니 당시 아난존자의 생각은 대단히 혁신적이었던 것.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을 따른다는 남방불교권은 계속 여성출가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데 그렇게 부처님 말씀을 어겨도 되는 건가?
여성들이여, 밥은 당신들이 하는데 그들 편협한 출가자들한테 공양 올리지 마시라, 굶어 봐야 정신 차린다.
처음으로 여인의 출가가 허용되어 카필라에서 바이샬리까지 부처님을 따라왔던 여인들이 출가 수행자가 된다. 당시 여성은 남성에게 예속되어 있는 존재에 불과했고 어느 종교든 여성출가자는 없었다. 그런 인도 사회에서 여성의 출가는 '여성 해방' 차원의 혁명적인 사건이었던 것.
하긴 지금 이 개명천지에도 인도에서의 여성 천시 현상은 여전한 것으로 보이니 당시는 오죽 했을까? 그리고 남방불교권에서는 이미 오래 전 비구니제도를 없애고 여성 출가는 허용하지 않는다. 여성출가에 일정 역할을 한 아난존자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부처님을 따른다는 부처님 후예들이 부처님 말을 안 들으면 갸들이 불교신자 맞는 건가? 난 아닌 것 같은데)
근데, 부처님 너무 여성 천시하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당신 후예들 다 보살님들 덕분에 먹고 삽니다. 그리고 바이샬리까지 따라왔던 석가족 여인네들, 석가족 젊은이들이 부처님 따라 대거 출가하는 바람에 야소다라처럼 생과부된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 당연히 챙겨주셨어야지요.
하긴 여성들의 출가를 어렵게 만든 이유 중 하나가 당시 탁발과 길에서 사는 수행자들의 삶이 여성으로서는 위험천만이었던 것이 현실적으로 큰 문제였을 것 같다. 지금도 여성을 천시하는데 그 당시 얼마나 문제가 많았을까. 실제로 당시 비구니들이 여러 폭력에 노출돼 많은 문제가 있었고 특히 성폭행 당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니 강간공화국 전통이 꽤나 오래 된 동네네. 그런데도 "찬미 인도" ?
안개 속에서 여성 출가, 2차 결집 내용 등 일휴 스님 열강이 이어진다. 보니 여행사 사장은 시간에 쫓겨 이제 출발해야 한다고 안절부절 못 하는 것 같은데 난 내용이 재미있어 열심히 듣고 있다. 특히 2차 결집 내용.
이곳 바이샬리에서 아라한들이 모여 2차 결집을 했는데, 계율 소소한 것 없애라는 부처님 유훈에 따라 유훈 지키고 새로 만들지 말자 결의. 그런데 현실적으로 지키기 어렵거나 변경이 필요한 내용 예를 들어 소금 소지 가능 여부, 최소한의 금전 소지 등 논쟁이 붙어 결국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되는 결과가 된다.
금은을 보시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상좌부, 시대변화에 따라 금은을 보시 받아도 된다는 대중부, 이들은 결국 갈라서게 된다. 기존 율법과 가치를 원칙대로 지키려는 자와 시대변화에 따라 융통성 있게 변화 시키려는 자, 그건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닐 거고 성향 차이인데 결국 중도의 길은 안 나왔나 보다.
우리나라 불교 교단 보시라, 뭘 그 정도 갖고 쪼잔하게 다투긴, 대충들 하시지!
대림정사를 나와 상가가 있는 작은 마을을 지나는데 요기도 나름 재미있다. 작은 수박만한 자몽 파는 사내들이 여럿 있는데 (자몽이 정말 디따 크다)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네.
근데 이상하다. “시님, 시님 이것 좀 드시와요” 하고 공양 올리는 오지랖 넓은 보살들이 여긴 왜 안 보이지? 에잉 이 동네 신심들이 없네.
동생 둘 데리고 열심히 어느 엉성한 악기 연주하며 노래하는 꼬마가 기특해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저건 정당한 노동의 대가니까. 근데 보니까 옆에 앉아 있는 어린 동생들이 더 많이 벌어. 긍께 수금책은 귀여운 동생들이다.
그 옆 초등학교인지 아이들이 운동장 바닥에 둥글게 둘러 않아 공부하는 모습이 보인다. 상황이 딱해 보여 아이들 학용품이라도 사주었으면 하고 선생님에게 보시 좀 하고 간다.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저 정도면 우리나라 한국전쟁 때 수준인데, 저게 실제 상황일까. 인도가 빈부격차가 심하긴 해도 교실이 없을 정도로까지 못 사는 나라가 아닌데 이건 심각한 사회체제의 문제. 이 나라 가장 큰 사회문제는 역시 심각한 빈부격차이고, 당분간 개선 여지가 없다는 것.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 여정, 바이샬리에서 쿠시나가르로
이곳 바이샬리는 부처님이 제자들과 이별을 준비하던 곳. 바이샬리에 머물던 부처님은 3개월 후 작은 마을인 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들 것임을 예고한다.
리치위족(릿차비족)의 바이살리는 당시 규모가 큰 강대국이었고 불교교단이 안정되어 있던 곳인데 부처님은 굳이 쿠시나가르로 힘든 여정을 떠난다. 그곳에서 마지막 제자(수바드라)를 만나 가르침을 주고, 탄생지 룸비니가 가깝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공양(춘다의 공양)을 받기 위해 작은 마을 쿠시나가르로 떠난다.
부처님은 바이샬리를 떠나며 아난다에게 “이로써 내가 이 아름다운 바이살리를 보는 것도 마지막이 되리라” 하며 되돌아 보았다고 한다.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 여정.
케사리아탑 – 부처님 첫 삭발지이면서 릿차비족들과 작별한 곳
대림정사에서 1시간 반 넘게 이동을 하니 길가 오른쪽에 제법 규모가 큰 케사리아대탑이 보인다. 이곳은 부처님이 싯다르타 시절 궁궐을 나와 출가의 길을 갈 때 지나갔던 곳.
유학자 정도전은 그의 저서 불씨잡변에서 부처님은 “왕위를 계승하지 않고, 아버지를 떠나, 아내를 버렸으니 인륜을 저버렸다”고 비판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그건 부처님의 깨달음을 향한 여정을 보지 못한 고지식한 유학자의 편견. 그의 출가는 인간이 고통에서 해탈하는 위대한 출발, 인류 지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 것.
카필라성을 나온, 즉 가출한 싯타르타는 이곳 케사리아 숲에서 만난 사냥꾼과 옷을 바꾸어 입은 다음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한다. 가출이 출가가 되면서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된 것. 위 없는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된 그는 평생 자신이 깨달은 법을 전하며 위대한 각자, 스승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의 생애 마지막 여정 입멸의 길을 떠나면서 자신이 수행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 케사리아 숲을 다시 지나게 된다.
그 때 부처님의 심정이 어땠을까. 위대한 각자의 삶을 살아온 부처님도 이곳에서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감회에 젖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마지막', 또 '이별'이란 단어는 언제나 슬프다.
바이샬리에서 케사리아(Kesariya)를 거쳐 쿠시나가르로
길가에 버스를 세우고 케사리아 스투파(발우탑)를 보러 간다. 지상 6층, 지하에 2개층, 총 8층의 발우탑(케사리아 스투파), 한 면이 200m 가 넘는 대탑이다.
여긴 오랫동안 탑이 있는 지도 모르고 있었다. 흙에 덮여 오랜 세월 그냥 높은 산이나 언덕인 줄 알고 있다가, 80년대에 비로소 발굴된 스투파. 이 성스러운 스투파를 80년대 들어 겨우 발굴 할 정도로 얘들 부처님을 잊고 살았다.
부처님이 입멸을 예고하고 바이샬리를 떠나오자 부처님을 따르던 바이샬리 사람들이 슬퍼하며 계속 따라오는 것. 하긴 위대한 스승이 떠난다는데, 열반에 드신다는데 그냥 ‘부처님, 바이바이’ 하고 맘 편히 작별인사를 하긴 어려웠을 테니 울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냥 하염없이 따라오지 않았을까?
<부처님 발우탑, 케사리아탑>
부처님은 그 자리에서 설법을 하고 자신이 사용하던 발우를 주면서 그만 따라오도록 한다. 가이드는 그게 마지막 설법이라고 했는데 아니다. 마지막 설법은 입멸 직전 쿠시나가르에서 행한 열반경일 테니. 그 발우를 모시고 세운 탑이 발우탑. 지하에 2개 층이 매몰되어 있어 다 발굴할 경우 세계에서 가장 큰 탑이 되는데 앞에 늪지가 있어 탑이 손상될 가능성이 커 더 이상 발굴하기 어렵다고 한다.
바이샬리 왓지 사람들이 이곳 케살리아 스투파에 모셔 두었던 부처님 발우는 유목민족이 세운 쿠샨왕조 카니시카왕이 이 지역을 점령하고 수도인 프르샤푸라로 모셔 간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그에게는 부처님 발우가 최고의 성물이었을 것. 부처님의 유일한 유물인 이 발우는 지금은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얘기도 있으나 확인 불가. 칸다하르는 탈레반이 폭파한 바미안석불이 있는 지역.
정말 부처님 발우가 보전되어 있다면, 부처님이 사용하신 유물이 정말 남아 있다면, 그건 정말 감동인데...
스투파에 군데군데 감실처럼 조성해 놓은 것이 보이는데 그 곳에 불상을 모시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 본다. 탑을 둘러보는데 다른 나라에서 온 순례자들이 계속 올라온다. 탑앞에 있는 늪지에 핀 꽃 구경도 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뭐 하나 구경도 하면서 시간 보내다 버스로 돌아온다.
이제 열반성지 쿠시나가르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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