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인도성지순례

[인도 성지순례 ⑭] 여섯째 날 – 바이샬리, 열반성지 쿠시나가라(쿠시나가르)에서 룸비니로

카페인1112 2020. 12. 27. 20:09

[인도성지순례 여섯째 날 ②] 바이샬리에서 열반성지 쿠시나가르, 그리고 탄생지 룸비니

 

쿠시나가르 열반성지 열반당과 열반탑

 

 

   열반성지 쿠시나가르로

 

  케사리아탑 참배를 마치고 입멸성지 쿠시나가르로 간다. 부처님이 걸었던 열반의 길. 어떤 사람들은 그 길을, 즉 바이샬리부터 케사리아 쿠시나가르로 이어지는 부처님 열반의 길을, 걸어서, 부처님처럼 걸어서 갔다는데, 차 타고 쉽게 가는 나는 그런 순례가 정말 부럽다.

 

  순례는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걷다 보면 그 힘든 여정에서 뭔가 작은 울림이라도 있지 않을까. 다리 꼬고 앉아 얻는  큰 깨달음이 성불로 가는 지름길일지는 몰라도, 길에서 걸으며 얻는 깨달음도 결코 작지는 않을 것 같다. 

 

점심 먹은 호텔에 모셔진 불상, 상호가 원만

 

  이제 술 못 먹는 비하르주에서 우타르프라데시주로 지역이 바뀐다. 그리고 작은 도시 쿠시나가르 도착. 여러 나라에서 사원을 지었는지 입멸성지답게 마을에 불교사원 모습이 여기저기 제법 보인다.

  호텔에 들어가 점심부터 먹고 오후 순례가 이어진다. 오후에 쿠시나가르 열반성지 순례 후 국경 넘어 네팔 룸비니까지 가는 일정.

 

  부처님은 29세에 출가 6년 고행 후 보리수 아래에서 35세에 성도, 45년간 법을 설하고 80세에 쿠시나가르 사라쌍수 아래에서 불신의 상주불변과 일체중생 실유불성을 가르치고 입멸, 위대한 각자의 생을 마친다.

 

  그 열반지 순례 길, 먼저 부처님 입멸 후 다비한 다비장(라마바르 혹은 람바르 스투파)으로 간다

 

  * 부처님 탄신일 음력 4 8, 출가일 2 8, 성도재일 12 8, 열반재일 2 15.

 

다비장에 세운 라마바르 스투파

 

   람바르스투파(Ramabhar Stupa)는 부처님 시신을 화장하고 사리를 수습한 다비장에 세운 불탑. 이곳 다비장은 원래 말라족이 대관식을 치르던 성소였는데 부처님을 위해 그들이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장소를 다비장으로 제공했다고 한다.

 

  입멸 7일 후 제자들이 다비를 하려 했으나 장작에 불이 붙지 않아 다비 불가능, 이 때 부처님이 상수제자 가섭에게 가르친 삼처전심(三處傳心) 중 세 번째 니련하곽시쌍부(泥蓮河畔槨示雙趺) 장면이 펼쳐진다.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뒤늦게서야 도착한 가섭존자가 비통해하자 관 밖으로 부처님의 두 다리가 뻗어 나왔다는 것. 무상한 육신과 달리 법신은 상주불변 하다는 가르침을 남기고 비로소 다비가 이루어진다.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장면

 

  라마바르스투파(Ramabhar Stupa)는 둥근 언덕 같은 반구형태로 세운 탑으로 부처님 입멸 후 말라족이 처음 스투파를 세웠고 이후 아쇼카대왕이 증축한 것으로 전해진다. 기단부 둘레가 42m나 되는 대형불탑이다. 

 

  이런 둥근 반구형 무덤 모양 탑 모습은 인도 전통적인 스투파 양식. 우리나라 탑 형태를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어색하지만 스투파가 무덤을 의미하고 인도 무덤양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이 스투파는 동아시아로 넘어 오면서 명칭이 탑이 되고, 형태도 독특하게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다. 중국은 전탑, 우리나라는 석탑, 일본은 목탑이 발달되어 주류가 된다.

 

 

인도 소녀들 사진 찍기 엄청 좋아한다. 

 

 

 

 

  부처님 입멸지 열반당으로

 

  람바르스투파 참배하고, 다비장에서 1.5km 떨어진 열반당으로 간다. 열반당은 부처님이 입적하신 장소에 세워진 사원

 

  열반은 산스크리트어로 니르바나, 팔리어로는 닛빠나, 그것을 한자로 음역한 것인 바로 열반(涅槃). ‘불어서 끈다는 뜻으로 이승의 탐 진 치 삼독(三毒)이 일으키는 번뇌의 불꽃이 꺼진다는 의미로 해탈과 같다.

  그런데 이곳 쿠시나가르에서의 열반은 부처님이 돌아가신다는 의미, 열반에 들어 입멸이라고도 한다.

 

 

   열반당에 모셔진 열반상에 가사를 입히는 가사 공양이 한 벌당 80불이라며 희망자 모집, 6.2m 거대한 와불상에 가사를 입혀 드리는 공양이 의식으로 자리잡았나 보다.

  현지에서 이 가사를 판매하는데 품질에 따라 가격 차이가 있는데 보통 20~50불 한단다. 가사공양을 한 가사가 일정 분량 되면 마을 사람들한테 희사해 가사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고 한다.

 

  가사를 들고 석가모니불 염송하며 열반당으로 행진. 이것도 나름 폼 나는 이벤트네. 그냥 입장하는 것보다 가사 들고 입장하니 불심 깊은 신자들이야 환희심이 팍팍 생기겠다. 그리고 열반당 관리하는 스님이나 연관된 사람들 복지 차원에서도 도움이 되겠고. 그런데 이 의식은 다른 나라 참배객들도 다 하는 모양이다. 그 덕분에 단체순례객들이 많을 때는 밖에서 한참 대기하기도 한단다.

 

부처님 열반상이 모셔진 열반당으로 가사 행렬

 

 

  춘다의 마지막 공양과 마지막 설법 '자등명 법등명'

 

  부처님은 춘다마을 불가촉천민인 춘다의 마지막 공양을 받고 쿠시나가르에 도착해, 마지막으로 자등명, 법등명을 설하신 후 열반에 든다. ‘제행은 무상하니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부처님의 열반송은 역시 스승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

 

  부처님이 설하신 설산동자의 구도열을 전하는 열반경 4구게를 떠올린다.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모든 것은 무상하니 이것이 생멸의 법, 생멸이 사라지면 열반의 즐거움이 된다.

 

 

 

  문득 학교 다닐 때 수업시간 기억이 떠오른다. 부처님과 관련된 내용을 가르치면서 석가모니는 배탈이 나서 죽었다고 한다고 이상하게 썩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던 기억. 속좁은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부처님께 마지막 공양을 올린 가난했던 춘다의 큰 공덕이라는 의미도 모르면서, 아니 불교의 불자도 몰랐던 사람이, 자신이 믿는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폄훼하고 그냥 깎아내리고 싶었던 것. 지금도 그 때의 표정 말투까지 선명하게 기억에 떠오른다.

 

  부처님의 인간적인 입멸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거룩한 죽음과 부활을 비교해 얘기하고 싶어서 입이 얼마나 근질거렸을까? 하긴 지금도 이교도들 그런 무지와 편견에다 배타적인 자세가 지독한데 그 70년대 그 시절이야 말해 무엇하리.

 

 

  지독히 궁핍했던 춘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정성을 다해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고, 부처님은 병을 얻을 것을 알면서도 다른 제자들은 먹지 못 하게 하고 본인만 그 공양을 드신 것. 그리고 부처님은 춘다의 공양을 여래의 생애 마지막 공양으로 가장 큰 공덕이 있다고 설한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춘다의 공양터에 스투파를 세우고 춘다의 공양을 기념하게 된다. 부처님의 삶은 하나하나가 다 교훈이고 가르침이었던 것.

 

 

  부처님은 쿠시나가르에 도착해, 제자 아난다를 시켜 "여래가 곧 열반에 드니 친견할 사람은 모두 오라"고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한다. 원하는 사람들을 모두 만나고 나서 마지막 제자 수바드라에게 깨달음을 주어 출가시킨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은 무상하니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유훈을 남기고 사라쌍수 아래 자리를 잡고 편하게 열반에 드신다.

 

All conditioned things are impermanent, strive on with diligence (for your own liberation)

- Last words of the Budda

 

 

 

  이곳 부처님 열반지도 13세기 무슬림의 침공으로 모두 파괴되어 오랫동안 잊혀졌으나 1,867년 영국 고고학자 커닝햄의 발굴로 알려지게 된 것. 발굴 이후 미얀마 불자들의 보시로 열반당을 다시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이 연노랑 색 열반당은 미얀마스타일

  지금도 열반당 관리를 미얀마 스님들이 하고 있다고 들었다.

 

 

   사원 안에는 5세기 굽타왕조 시절 조성된 6.2m 크기의 부처님 열반상을 모셨다.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 이 열반상은 승려 하리발라가 조성했는데, 이 와불 형태는 세계 각국에 전파되어 같은 양식의 열반상이 조성되게 된다. 그런데 이 열반상도 열반지가 폐허가 되면서 심하게 훼손되어 강바닥에 방치된 것을 찾아내어 원래 모습으로 복원 했다고 한다.

 

  열반상 아래 세 개의 부조가 있는데, 양손을 땅에 짚고 슬퍼하는 말라족 여인(혹은 춘다), 가운데 명상에 잠겨 있는 스님(마지막 제자 수바드라 혹은 열반상을 제작한 하리발라 승려), 한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실의에 빠져 있는 아난 존자의 모습.

 

  열반당에서는 가사를 입혀드리는 의식을 하며 석가모니불을 염송한다. 좁은 법당 안에 참배객들이 워낙 많아 어수선할 정도. 하지만 잠시 부처님의 열반 의미를 되새기며, 나도 언젠가 깨달음의 인연을 만들 수 있기를 기도했다.

 

 

   열반당 뒤 55m의 둥근 스투파가 있는데 부처님이 열반에 들었던 장소에 부처님 사리를 모신 스투파. 쿠시나가르 말라족 사람들이 분배 받은 사리를 모시고 탑을 세운 것.

 

  12세기 이후 잊혀져 폐허로 있다가 커닝햄의 발굴했고, 1903년 미얀마 승려들이 열반당을 다시 세운다. 8세기 혜초스님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에도 이미 탑만 남아 있고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였다고 전해진다.

 

열반당과 열반탑 주변은 당시 승원이나 봉헌탑 흔적들

 

 

  이제 부처님 열반성지를 떠나야 할 시간. 열반당 근처 부처님이 마지막 설법을 한 마타 쿠아르(Matha kuar) 사원은 어디일까? 그곳 아름다운 불상을 보고 싶었는데 혼자 행동하기 불편해 포기.

 

  강에서 목욕을 하신 부처님은 지금의 마타 쿠아르 사원 자리에서 마지막 설법을 하고, 근처 사라쌍수 아래 편히 누워 열반에 드신 것. 마타쿠아르사원이나 사리분배지, 춘다 집터에 세워진 춘다스투파 등도 인연이 없었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근본8탑>

 

  부처님 입멸 후 8개 부족,나라에서 부처님 사리를 모셔가 사리탑(불탑)을 세우게 된다. 이것이 근본 8탑이며, 사리신앙의 기원이 된 것.

 

  가이드는 16개 나라 왕들이 서로 사리를 모셔 가겠다고 싸워 한 바라문이 1주일간 계속 기도하는 나라에 주자고 중재 하여 8개 나라 왕이 일주일간 기도했다고 한다. 아니 부처님 사리를 모시는데 왕들이 일주일을 못 버텼다고? 이거 사실임?  이건 이해하기 어렵다.

  기록에는 이 지역 쿠시나가르 말리(Mallas)족이 부처님 사리를 독차지 하려고 욕심을 부려 분쟁이 일었으나 바라문 도냐(Drona)가 "그건 부처님 뜻에 어긋난다"며 중재해 그 자리에 모인 8개 나라와 부족에게 사리를 8등분 해 모셔 가게 했다고 전해진다.

 

 * 8개 나라: 마가다국 아자타사트루왕, 바이샬리 릿차비족, 카필라바스투 샤카족, 알라캅파 불리(Bulis)족, 라마가마 꼴리(kollyas)족, 베타디파 브라흐만(brahmin), 파마의 말라(Mallas)족, 쿠시나가르 말라족 

 

  부처님 사리를 8등분해 모셔간 부족 중에 부처님 출신지인 샤카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당시 샤카족 카필라성은 이미 코살라국에 의해 멸망했고 일부 살아남은 부족들은 각지로 흩어진 상태. 즉 부족들이 온전하게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운 상황이었다.

 

  강대국 코살라국 파세나디왕이 부처님 인척인 석가족 출신 왕비를 맞고 싶어 카필라바스투에 왕녀를 요구하자 그게 싫었던 샤카족들은 왕녀 대신 천한 여종의 딸을 속여서 보낸다.

  후일 그 하녀가 낳은 아들은 그 비밀을 알게 되었고, 어찌어찌해 그가 코살라왕이 되면서 샤카족의 비극이 시작된 것. 샤카족 모든 남자를 죽이라는 코살라왕의 명령에, 항복한 샤카족 왕은 연못에 들어가 나올 때까지만 사람들이 도망가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도망갈 시간은 안 될 걸로 생각해 오케이했는데 이 왕이 연못에 들어가 계속 안 나오는 거라. 물속 나무뿌리에 머리를 감아 놓고 죽어 덕분에 일부 샤카족 사람들이 탈출할 수 있었던 것. 일부는 상카시아로 일부는 네팔 파탄 히말라야지역으로 탈출해 지금도 그 지역에서 샤카족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한다.

 

  그런데 그 부족이 사리 분배에 참여한 걸 보면 그 사리 분배 자리가 그렇게 규모가 큰 집단들만 참석한 건 아니었나 보다.

 

 

  부처님 사리를 8개로 나누고, 분배 끝난 후 찾아온 몰리아 족에게 다비에 사용했던 숯과 잿더미(잿탑), 바라문 도냐가 중재에 사용한 병을 갖고 가 세운 탑(병탑)을 합쳐 당시 열 군데에 사리탑를 세우게 된다. 거기에 미얀마에 있는 생시의 머리칼 탑도 있었고. 이 때부터 생긴 불탑신앙은 동아시아지역 불교 전래와 함께 같이 전해져 다양한 불탑이 세워지게 된다.

 

 

  부처님 머리카락을 봉안한 미얀마 황금사원

 

  미얀마에 있는 탑은 성도한 부처님이 라자야따나 나무 아래서 선정에 들었을 때 마침 지나가던 두 상인 따붓싸와 발리까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것이 인연이 되어 만든 탑. 그들이 부처님을 떠나면서 신물을 요청하자 부처님이 머리카락 몇 개를 뽑아 준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왕에게 그 머리카락을 바쳤는데, 왕은 그 신물을 소중하게 여겨 스투파를 세워 그 머리카락을 보관한다.

 

  그 스투파가 계속 보완되고 커져 바로 지금의 미얀마 황금사원 쉐다곤파고다가 된 것. 쉐다곤 스투파를 세우기 위해 인공적으로 높게 산을 만들었는데 그 산을 만들기 위해 흙을 파낸 곳에 생긴 호수가 바로 파고다 옆 깐도지 호수

 

쿠시나가르 떠나며

 

 

   쿠시나가르에서 탄생 성지 룸비니로

 

   입멸지 순례를 마치고 이제는 4대성지 중 탄생지 네팔의 룸비니로 간다.

  게송에 나오는 불생가비라(佛生迦毘羅) 성도마갈타(成道摩竭陀) 설법바라나(說法婆羅奈) 입멸구시라(入滅拘尸羅) (佛恩想起偈)에서 3곳 순례를 마쳤고, 이제 부처님이 태어나신 가비라성만 남았다. 순례를 초전법륜 성지에서 시작해 태어나신 룸비니를 마지막으로 간다.

 

  오후 2시 네팔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로 출발. 부처님 출생지인 룸비니는 네팔 테라이지방 남서부에 있는 평원 지역. 그래서 네팔 사람들은 부처님이 인도인이 아니라 네팔인이라고 주장한다고도 한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네. 출생지야 분명 네팔 땅이 맞고, 작은 도시국가 수준의 샤카족을 꼭 인도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당시 석가족 영토는 지금 인도 네팔 국경지역에 걸쳐 있어, 카빌라성과 탄생지 룸비니는 네팔 땅, 석가족이 세운 진신사리탑은 인도 땅에 있다.

 

건널목 풍경

 

  네팔로 향하는 길. 그냥 작은 시골마을과 도로가 작은 상점들이 이어진다. 길가 풍경들 보면 우리나라 60~70년대 모습정도 되겠다.

 

  들판 하천가에 작은 탑을 잔뜩 만들어 놓았다. 힌두교도들의 작은 소망탑. 문득 소원 비는 건 왜 물가가 좋은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도 해수관음처럼 바닷가에서 많이 기도하는 것 같은데.

 

 

 

  네팔 국경까지 4시간 걸린다고 하더니 이건 버스 타는 시간만 4시간, 인도 출국 국경 수속에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린다. 버스 안에서 그냥 한없이 대기하는 것. 출국사무소 직원은 하나인데 우리 인원은 많으니 불가피한 것인가. 버스에 대기하고 있다가 차례가 되면 내려서 여권을 사무소 직원에게 제출해 본인임을 확인한다.

 

  그런데 잠시 국경 출입국사무소 앞에 줄 서 있는데 사나운 모기떼가 사정 없이 덤벼 든다. 우리나라 산모기 이상으로 사나운 놈들. 준비물에 모기약이 있었는데 필요한 상황은 이곳 국경 한 군데, 근데 막상 필요할 때는 갖고 나오지 않았다.

  국경 수속 밟을 때는 혹시 모르니 모기 회식 싫은 분은 꼭 모기약 준비하시라!

 

 

 

  출입국사무소 앞에 줄 서 있는데(모기한테 뜯기며) 가이드가 자신이 팔목에 끼고 있던 침향 단주를 연세 드신 보살 한 분께 끼워주면서 한 마디로 약을 판다.

 

     ”이거 침향으로 만든 거라 아무리 오래 돼도 향이 없어지지 않고 건강에 좋아요. 게다 모기도 안 덤빕니다

 

   에잉, 단주를 '향나무가 늪속에 오랜 세월 잠겨 만들어진 침향'으로 만들었다고? 무협지 보면 침향이 내공 증진에 효과가 큰 고가의 영약 재료던데, 그 귀한 침향이라고! 갑자기 귀가 솔깃해 진다.

 

 

  가이드가 선물로 좋다고 계속 약을 파니 이미 두 개를 주문했던 연세 드신 맘씨 고운 보살님 두 아들 준다며 두 개를 추가로 주문한다. 그리고 옆에 서 있던 다른 분들도 하나씩 주문하고. 사실 인도 와서 사갈 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절에 자주 가시는 어머니 드리려고 나도 단주 하나를 주문했다.

 

  그런데 나중 인도에 정통한 김 법사님, 단주 주문 했다니까 가격을 물어본다. 100달러 줬다고 하니 뭐 이런 멍청이가 다 있어하는 어이없는 표정. 그 표정으로 짐작 하건대 10불이면 살 걸 100불 줬어. 아 이 팔랑귀 또 당했네. 아마 10불 달라고 했으면 안 샀을 텐데, 100불에 넘어갔다.

 

 

  근데 나중 돌아와 어머니께 이 비싼 단주를 드렸는데 별로 반가워 하지도 않고, 정말 예상 밖으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시큰둥 하신 것. 이런 망했다, 인도 가서 선물은 그거 하나 사왔는데. 그리고 그게 그리 귀한 침향일 리가 없지. 나중 생각해 보니 절에 다니시는 어머니는 그게 싸구려라는 걸 대번 알아보신 거다.

 

 

  출입국수속 마치고 네팔로

 

   다행히도 인도 출국수속과는 달리 네팔 입국은 단체로 처리(비자발급용 여권 사진 1장 제출)해 휙 지나쳐 금세 끝났다. 덕분에 양국 국경 수속에 2시간 반밖에 안 걸린 것젠장, 네팔은 좋은 나라!

 

  네팔, 역시 힌두교 국가이고 같은 인도문화권. 사회 상층부 대부분이 인도계이거나 인도계 카스트에 속해 있다고 한다.

 

 

 

  탄생성지 룸비니

 

   히말라야 남쪽 네팔 남동부 평원의 부처님 탄생성지 룸비니. 어렸을 때부터 들어 익숙했던 이름이고, 뭔가 평화롭고 아름다운 낙원일 것 같은 느낌. 8대 성지 중 유일하게 인도가 아닌 네팔 땅. 8대 성지 중 한 두 군데라도 불교신자가 많은 미얀마나 태국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국경 넘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룸비니에 들어서니 깜깜한 밤. 부처님 탄생지를 보려던 일정은 꼬였고 그냥 호텔로 들어가 늦은 저녁 먹고 잔다.

  어릴 때부터 꿈꾸며 보고 싶었던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 첫 날은 그렇게 피곤에 쩔어 호텔방에서 골아 떨어지고 말았다. 룸비니에서 제일 좋은 호텔이라는데 우리나라 모텔만도 못한 장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