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다섯째 날 ①] 부처님 교화의 주 무대 영취산과 라즈기르(왕사성), 세계 최고 나란다대학 (11/2(토))
부처님 8대성지 라즈기르(왕사성) - 영취산 여래향실, 죽림정사
이제 여행 중반인 5일차, 오늘은 보드가야 ‘깨달음의 성지’를 떠나 부처님 교화의 주 무대 라즈기르를 둘러보는 일정. 보드가야에서 왕사성(王舍城)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라즈기르(Rajgir)까지는 80km 거리로 2시간 반 소요. 교화의 터전이었던 이곳 라즈기르(왕사성)도 부처님 8대성지 중 하나.
먼저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신 라즈기르 외곽 영취산에 올랐다가 빔비사라왕이 교단을 위해 세운 최초의 불교사원 죽림정사 터를 만난다. 이어 현장, 혜초 등이 수학했던 나란다대학 순례.
보드가야에서 라즈기르(왕사성)로 가는 중간 바라바르(Barabar) 언덕에 마우리아 왕조 때 조성되어 인도에서 가장 오래 된 석굴이 있다는데 아쉽게도 이번 일정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불교사원인 로마스 리쉬 석굴은 인도 고전적인 석굴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그 석굴 형태가 우리나라 석굴암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소박하고 단조로운 석굴 형태였을 텐데 이후 규모가 크고 복잡한 구조로 변해 갔을 게다. 가는 길에 들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마 이건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성지를 보는 관심사 차이겠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인도 농가 마을들. 작은 벽돌 진흙집 몇 채씩 있고 농경지도 별로 넓어 보이지 않는다. 집앞 멍하니 쭈그려 앉아 있는 남루한 옷차림의 사내는 꼭 평생 그렇게 앉아 세월을 보냈을 것 같은 분위기.
인도 시골 풍경은 어쩌면 저렇게 한결 같을까.
빈궁하고 한적한 시골농가 풍경과는 다르게 작은 도시들 야채와 과일 시장은 힌두교 축제준비로 번잡하고 풍요롭다. 신에게 바치는 공양물 준비를 위해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과감히 지갑을 여는지 시장이 풍요로워 진 것.
힌두들은 축제기간 3일동안 비식물성 음식은 섭취하지 않고 과일 등을 신에게 공양으로 바치기 때문에 과일 야채 가격이 축제 기간에는 두 배 이상으로 오르기도 한다. 이틀간 기도하는데 특히 일몰 때 강에 집결해 기도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마가다국 수도였던 라즈기르
비하르주 라즈기르는 부처님 당시 지금의 보드가야와 파트나 지역을 지배했던 강대국 마가다국의 수도로 당시 인도 최대의 도시였다고 한다. 라즈기르의 옛 지명이 라자가하(王舍城).
당시 마가다국을 다스리던 빔비사라왕은 수행자 시절의 부처님을 만나 성불하면 꼭 마가다국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한다.
사르나트(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설한 부처님은 수행자 시절 빔비사라왕과의 약속을 지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마가다국으로 향한다.
도중 보드가야 근처에서 불을 섬기던 카샤파 3형제 교단 제자 천 명을 제도하고, 이들을 데리고 라즈기르로 갔다. 보드가야에서 왕사성까지만 300km 가 넘는 먼 곳. 맨발로 걸어서, 그것도 탁발해 가면서, 바로 길 위에서의 삶.
부처님 설법을 듣고 깨달아 수다원과를 얻은 빔비사라왕은 즉시 부처님께 귀의했고 이후 부처님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어 라자가하(王舍城)는 수 많은 수행자들이 찾는 불국토가 된다.
빔비사라왕은 부처님과 제자들이 생활할 수 있게 죽림정사(웰루와나정사)를 지어 교단에 바치는데, 이 죽림정사가 최초의 불교 사원으로 5정사 중 하나. 왕사성 남쪽 가란다에 있어 가란다죽림이라고도 한다.
또, 이곳 라즈기르는 부처님을 질투한 사촌 데바닷타와 왕자 아자타삿트루가 술 취한 코끼리를 보내 부처님을 해치려고 했던 곳.
염화미소(拈華微笑)의 영축산(영취산)
라즈기르에서는 먼저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을 설했다는 영취산으로 간다. 영취산은 줄여서 영산. 대중을 상대로 법화경을 설하신 모임을 영산회상, 그걸 그림으로 그린 것이 영산회상도, 그 현장을 재현하는 것이 바로 영산재.
매일 부처님 전에 예배드리는 예불문(禮佛文)에도 ‘영산당시 수불부촉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靈山堂時 受佛咐囑 十大弟子 十六聖 五百聖)이 나온다. 영산당시가 바로 이곳 영취산에서 부처님이 설법하실 때를 의미하고 부처님 생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시기.
영취산에 오르기 위해 버스에서 내리니 제일 먼저 염주 파는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달려든다. 가이드가 차에서 내리기 전에 염주 질에 문제가 있으니 사지 말라고 경고를 했으니, 이들은 그냥 공치는 것. 앞을 막고 들이대는 기념품 판매꾼들에다 구걸하는 새까만 손들까지, 그 행렬 손길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았다.
영취산 오르는 길, 여래향실과 독수리 모양 바위가 있는 작은 봉우리 정상까지는 30분이 채 안 걸리는 길. 산길 포장로 따라 완만한 길을 오르는데 길 양옆 역시 구걸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서 있다. 어린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그 간절한 모습이 너무 부담스러워 길을 걷기가 어려울 정도. 그렇다고 이 많은 인원 다 주기도 그렇고 그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걷는다.
그런데 웃기는 게 원숭이들도 그걸 보고 따라 하는 건지 아니면 인간 구경하는지 길옆에 원숭이들까지 죽 늘어서 앉아 있더라.
이 길은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 걸어서 올랐다는 빔비사라왕의 길인데, 부처님 친견을 위한 성스러운 길인데, 솔직히 걷는 그 길 조금도 성스럽지도, 장엄하지도 않고 그냥 평범한 산책 길 분위기. 원숭이 엉덩이도 구경하면서 천천히 오른다.
올라가다 빔비사라왕과 연관된 스투파 터가 두 군데 있다는데 모르고 그냥 지나쳤다. 당 현장이 지은 '대당서역기' 기록에 빔비사라왕은 영취산 길목에 '하승'과 '퇴범'이라는 탑을 세웠다고 한다. 하승은 '말이나 수레에서 내리라'는 뜻이고, 퇴범'은 '속된 자는 물러가고 성스러운 마음으로 오라'는 의미.
빔비사라왕 때는 이 길이 그렇게 성스러운 길이었는데, 지금은 세속적인 지극히 세속적인 길. 걸어 오르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잠시 걸으니 부처님 10대 제자인 아난존자(다문제일) 수행처가 있고, 조금 더 오르니 지혜제일 사리불존자가 수도했다는 굴. 반야심경에 나오는 사리자가 바로 사리불로 부처님 제자 중 지혜가 제일 높아 ‘지혜제일 사리불’
온통 금박으로 장식된 굴 안에는 작은 부처님 그림을 모셔 놓았고, 그 앞 오색 불교기 위에 누군가의 시주인지 지폐 몇 장이 놓여져 있다. 저런 수입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유적지 보전이 가능하겠다.
참고로 부처님 10대 제자는
1. 지혜제일 (智慧第一) - 사리불 (舍利佛)
2. 신통제일 (神通第一) - 목건련 (目健連)
3. 두타제일 (頭陀第一) - 마하가섭 (摩訶迦葉)
4. 천안제일 (天眼第一) - 아나율 (阿那律)
5. 해공제일 (解空第一) - 수보리 (須菩提)
6. 설법제일 (設法第一) - 부루나 (富樓那)
7. 논의제일 (論議第一) - 가전연
8. 지계제일 (持戒第一) - 우바리
9. 밀행제일 (密行第一) - 라훌라
10. 다문제일 (多聞第一) - 아난다
* 이 중 밀행제일 라훌라존자는 바로 부처님 아들.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싯다르타는 "아 라훌라' 하며 탄식을 한다. 라훌라는 '장애'라는 뜻. 그리고 부처님은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출가, 그 라훌라가 그대로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출가한 부처님이 성도 후 카빌라성을 방문했을 때 아들 라훌라는 12살. 어머니 야소다라는 아들에게 부처님에게 가서 "아버지가 물려줄 것을 달라"고 요청하라고 한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 자리에서 아들 머리를 깎고 출가 시킨다. 최초의 어린 사미승.
정반왕은 아들 싯다르타 태자에 이어 손자까지 출가하게 되자 기절초풍 손자출가를 막아섰으나 이미 기차는 떠난 것. 라후라는 이후 아라한과를 얻고 10대 제자까지 된다.
사리불존자 수행터를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오색의 티벳식 깃발 타르초(바람의 말)가 잔뜩 걸려 있다. 티벳인들은 깃발에 만트라나 경전을 가득 써놓아 불법이 바람에 날려 온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길을 가다 타르초가 휘날리는 고갯마루에 멈춰 소망을 빈다는 것.
계단 길을 올라가니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했다는 여래향실이 보인다. 작은 봉우리인데 제법 넓은 터가 있어 부처님 자리인 조그만 여래향실이 있고 주변에 꽤 많은 인원이 앉을 수 있다. 물론 그 크기야 수십 명 앉을 정도라 우리 일행들이 다 앉기에도 좁은 정도.
그 자리에서 같이 예불을 올리고 기도를 한다. 사실 이곳이 부처님이 법화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설했다는 장소이니 얼마나 감격스런 자리인가?
법화경은 금강경 화엄경과 함께 대승삼부경 중의 하나로 불교교리의 핵심을 다 담고 있어 대승경전의 백미, 꽃이라 불린다. 법화경 방편품 사구게를 떠올린다.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모든 법은 본래에서 오면서 항상 적멸의 모습이니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불자가 이런 도를 수행하면 오는 세상에 반드시 성불하리라.
‘이 세상 모든 것 본래부터 고요하고 청정하니, 이런 도를 수행하면 내세에 반드시 성불하리라’ 그래서 불자들은 헤어짐의 인사가 “성불합시다. 성불하십시오” 하지만 성불보다는 그냥 나무묘법연화경만 열심히 외우면 복을 받고 극락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이 더 쉽고 효율적인 방편이 되겠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가 기복 종교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데 솔직히 주변 산세나 경관이 너무 약하다. 시야가 확 트이긴 하지만 대단한 조망처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렇게 많은 인원이 모일 수 있는 넓은 자리도 아닌데, 왜 굳이 부처님은 이곳에 올라 법을 설하셨을까? 아니면, “이 자리 맞아?”하는 삿된 의심까지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자리에 '법화경 견보답품' 내용을 그대로 떠올리자 상황이 달라진다. 여래향실에서 사부대중에게 법화경을 설하는 석가모니 부처님 앞에 다보여래가 탑의 모습으로 나타나 설법이 진리라고 증명하는 성스럽고 장엄한 장면을 떠올린다.
대중들은 감동으로 몸을 떨며 각자 서원을 말할 것. 그러자 이곳이 차원이 다른 야단법석(野壇法席)으로 변한다. 두 분 부처님이 혹은 석가탑과 다보탑이 마주한다면 이 자리가 바로 진리 그 자체, 우주의 중심이다.
화엄경과 함께 대승경전의 백미로 불리는 법화경은 기원 전후 대승불교도들에 의해 성립된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봉암사 적명스님 설법에서 들은 바로는 “대승비불설은 맞으나 대승사상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 없으니 부처님 사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무식의 소치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은 아득한 옛날에 이미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고 중생교화를 위해 다시 이 땅에 현신하신 것. 초기 깨달음을 강조하던 불교는 대승으로 넘어 오면서 부처님을 이상화 하기 시작해 3신(불신, 보신, 화신)이 등장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법신과 동일시 해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또 법화경에는 대자대비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묘사하고 있고, 이 부분을 관음경이라고 해 별도로 중시되어 왔다. 즉 믿음을 강조하고 실질적인 다신교로 바뀐 것.
우측 봉우리에 일본인들이 세웠다는 산티 스투파가 보인다. 쟤들 돈이 많으니 여기저기 신경을 많이 썼네. 우리나라 땅 많고 돈 많은 모 종단은 모 해? 중들이 돈 많아 걸핏하면 노름하다 언론에 등장하는데 (오어사 전 주지가 실토한 노름규모가 꽤나 크던데) 그럴 돈 불교성지에 좀 써라. 하긴 돈 쓰는 것도 안목이 있어야 제대로 쓰는 거다. 안목이 없으니 걸핏하면 노름에다 은처승 의혹까지 받는 게 당연.
그런데 저렇게 커다랗게 산 정상에 탑 세운 게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높은 곳에서 부처님 설하신 자리를 내려보는 싸가지 없는 소행처럼 보이는 건 내 속 좁음 탓일까. 꼭 금강산 가서 김씨네 왕조 숭배하는 큰 글자 새겨 놓은 걸 봤을 때 느꼈던 기분 그대로다.
여래향실에서 내려오는데 가이드가 독수리 모양으로 보이는 바위 아래 계단 자리를 알려주며 거기서 올려다 보란다. 꼭 독수리 모양이라고. 물론 독수리 형상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이것 때문에 영취산이라 불린 건 아닐 게다. 산마루 형상이 독수리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라고 들었다. 우리나라에 있는 영취산(영축산)은 이곳 인도 영취산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고.
영취산에서 내려오니 일본인들인지 리프트 타고 일본 일련정종에서 산 정상에 세웠다는 스투파 가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제법 보인다.
문득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 읽은 내용이 떠오른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한 왜 수군들은 불법의 신통력으로 전투를 인도해 주기를 기원하는 소망으로 큰 배마다 비단으로 만든 나무묘법연화경 깃발을 커다랗게 만들어 걸고 다녔다. “나무묘법연화경”이 바다를 가득 메우고 밀려 들었던 것. 남의 땅을 침공하는 자들이 죄 없는 상대방은 죽여야 좋고 부처님의 가피로 자신은 살고 싶었을까?
임란 때 왜구들은 법화경 깃발만 매달고 온 게 아니다. 잔인하고 탐욕이 심했던 고니시 유키나가, 독실한 야소교 신자였던 그는 십자가 깃발을 크게 걸고 쳐들어와 살육과 약탈을 일삼았으니 말이다.
소설에서는, 가난했던 조선 수군들은 그 질 좋은 비단 깃폭을 찢어 부상자 상처를 싸매거나 옷을 만들어 입었다. 아, 헐벗고 굶주렸던 수졸들이 법화경 글자 무늬 비단으로 옷을 해 입었으니 부처님 대자대비 가피로, 웬 대령 놈이 돈 받고 납품 받았다는 불량 방탄 조끼보다도 성능 좋은 신형 방탄조끼 수준이었을 게다.
수졸들 덕에 흰 비단은 제 쓰임새를 비로소 찾았다.
빔비사라왕 감옥터
영취산에서 내려와 부처님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던 빔비사라왕 감옥터로 간다. 마가다국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이 수행자 시절 자신과 한 약속을 지켜 라자가하(왕사성)에 오시자 부처님과 제자들을 궁전에 모시고 법문을 듣는다.
그는 그 자리에서 부처님에게 자신은 어릴 때 다섯 가지 소원이 있었다고 말한다. 첫째는 왕위에 오르는 것, 둘째는 자신의 영토에 부처님을 모시는 것, 셋째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예경을 올리는 것, 넷째는 부처님이 자신에게 법을 설해 주시는 것, 다섯째는 그 법을 깨닫는 것. 이렇게 말 하고 부처님과 교단에 죽림정사(웰루와나정사)를 지어 부처님 일행이 그곳에서 생활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부처님의 최고 후원자였고 전륜성왕이었던 빔비사라왕은 전생에서 수행자(선인)를 죽인 죄업을 씻기 위해 아들 아자타사트루에게 순순히 유폐 당하고 죽는다. 그가 갇혔던 감옥터는 영취산 아래 그냥 휑한 넓은 빈터.
이곳은 왕비 위제희와의 일화가 전해지는 곳. 빔비사라왕을 감옥에 가둔 아자타사트루는 자신의 어머니인 위제희 왕비 말고는 누구도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고, 빔비사라왕에게 음식을 주지 않아 굶어죽이려 했다. 그러자 위제희는 온 몸에 우유와 꿀을 바르고 빔비사라왕을 만나 왕은 그걸 먹고 상당기간 연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가 안 죽은 걸 이상하게 여긴 아자타사트루에게 발각되고 빔비사라왕은 결국 아사당하고 만다.
독실한 불교 신자로 부처님께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를 바치고, 자신의 죄업을 씻기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선 그였으니 다른 종교 기준으로 보면 고귀한 성자이고 수호신.
그의 신화적 삶이 다양한 문화적 주제로 펴져 나갔을 것이고, 그가 마지막을 보낸 그 땅엔 요란한 기념물이 세워지고 성지로 보존되었을 것. 하지만 이곳은 빌어먹을, 아쉽게도 불교신자가 거의 없는 인도 땅. 그냥 빈 땅이다.
영취산에서 죽림정사 가는 도중 지바카 망고농장터를 지난다. 부처님이 망고를 좋아하는 걸 알고 빔비사라왕의 주치의였던 지바카가 승단에 망고농장을 기증했다는 곳.
최초의 불교사원 죽림정사
빔비사라왕 감옥터에서 버스로 10분 정도 가니 죽림정사, 마가다국 왕사성 북쪽의 가란타죽림에 세워진 최초의 불교사원이다. 사위성의 기원정사와 함께 2대 정사.
원래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수행자들은 처음에는 승원이란 게 없이 들판이나 동굴에서 생활을 하는 게 당시 관례. 그런데 우기 3개월간 많은 교단 인원이 모여 생활하기 불편하니 사원이 필요하게 되었고 정사가 생기게 된 것.
죽림정사 터로 들어서니 입구에 약간 볼품 없는 사원 하나가 보인다. 죽림정사 자리에 세워진 태국 절이라든가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좀 아쉽다.
제대로 당시 정사 모습을 고증해서 짓거나 아니면 제대로 사원을 세웠으면 좋았을 텐데, 연못 가 일본인들이 세웠다는 작은 전각의 불상마냥 뭔가 어설프다.
일행들은 태국사원에 들어가 열심히 절들을 하고 나온다. 과거 대나무가 많아 죽림정사인데 지금은 그런 흔적은 별로 없고 큰 연못만 하나 보인다. 이곳 칼란다카 연못에서 부처님과 제자들이 더위에 몸을 씻었다는 곳. 그리고 부근에서 부처님이 설법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연못 다시 파 놓은 지 얼마나 됐을까? 제대로 발굴하고 고증해서 연못을 복원해 놓은 건지 아니면 그냥 파 놓은 건지 솔직히 의심스럽다. 불교가 자취를 감춘 인도에서 강산이 수 없이 변한 2600년전 당시 모습을 과연 어찌 찾을 수 있을까?
제대로 고증이 되었다면, 그리고 발굴작업이 되었다면 이곳에서 의미 있는 불교 유물, 유적지가 발견되었어야 하는데 그런 설명이 없는 걸 보면 제대로 되지 않은 것. 나중 갔던 기원정사 유적지와는 차이가 너무 컸다.
별로 볼 것도 없는 죽림정사 터를 씁쓸한 마음으로 나온다. 이제 최초의 불교대학 나란다로 간다.
제자 박카리에게 준 가르침 - 나를 보려거든 법을 보라.
나란다로 가는 길, 부처님이 죽림정사에 계실 때 죽음을 앞둔 제자 박카리에게 준 가르침을 떠올린다. 부처님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부처님 뵙기를 간절하게 원했던 제자를 찾아,
“법을 보는 자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 법을 보아야 한다. 그러니 나를 보려거든 법을 보라. 늙어가는 육신이 아니라 진리의 가르침을 보라”고 일깨워 준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 절에 다니면서, 부처님을 보는 사람도, 스님을 보는 사람도 아니면 돈을 보는 사람도 있겠지. 그러면 그동안 나 자신은 어떠했는가? 가르침을 보러 얼마나 노력했던가. 지나간 시간과 모습이 그냥 허무해 진다. 깨달음을 향한 열정도 순수함도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현실이야 어쩔 수 없었다 치자. 그러면 이제 남은 시간에 대해 고민해 볼 시기. 그 잠시 동안의 고민만으로도 이번 순례여행이 그리 덧없지는 않으리.
이제 나란다불교대학으로
죽림정사를 나와 다시 버스에 올라, 기원 후 5세기 경 세워진 최초의 불교대학 나란다불교대학으로 간다. 라즈기르 북쪽 그리 멀지 않은 곳.
길가 기름과자처럼 보이는 걸 파는 가게들이 많이 보인다. 이게 인도인들 국민 간식인가? 맛이 궁금했는데 이거 잘못 먹으면 배탈 난다고 해 감히 도전할 엄두도 못 냈다.
왕사성 부근에 부처님 입멸 직후 가섭존자 주도로 1차 결집을 했던 장소인 바이바라산 칠엽굴이 궁금했는데 이번 여정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가섭존자는 부처님이 세 번 법을 전한 삼처전심(三處傳心)의 제자. 부처님 입멸 직후 부처님 가르침이 후대에 잘 전해질 것인가를 고민, 가르침과 계율을 결집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하여 500여 아라한들이 왕사성 부근 칠엽굴에 모여 1차 결집을 하는데 이때 결집은 모두 함께 암송하면서 외우는 것. 당시 기억력 천재이자 부처님 시봉이었던 아난존자가 경을, 우바리존자가 계율을 먼저 독송하면 모두 함께 합송하면서 외우는 것.
아난존자가 여시아문(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하면서 부처님이 설한 경전을 암송할 때 그 때 모였던 제자들은 스승에 대한 그리움으로 감정이 북받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부처님 입멸 백년 후 바이살리 거주 비구들이 모여 계율에 대해 논의하고 2차 결집. 이때 계율에 대해 일부 완화하는 새로운 해석 주장을 하는 대중부와 반대하는 상좌부로 분파되게 된다. 기원전 3세기 아소카왕의 주선으로 경, 율, 논을 정리하여 3차 결집, 결집된 내용을 나뭇잎에 새겨 바구니 속에 보관해 3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나란나대학- 세계 최초, 최대의 불교대학
나란다대학. 부처님도 이곳 나란다 망고숲에서 여러 번 머물렀다고 하며 라즈기르(왕사성)에서 바이살리 가는 길에 있어서 수행자들이 많이 다녔던 곳. 사리불과 목건련 존자가 이곳 출신.
그런데 의외로 많은 인파. 나란다대학 보려는 관광객도 제법 많은 데다, 힌두교 축제 영향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알아봤더니 힌두교 의식에 참석하기 위해 맨발로 걸었던 것. 맨발로 과일바구니를 들고 강으로 간다.
나란다불교대학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 인도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29개, 자연유산 7개, 1개의 복합유산이 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보드가야의 마하보디사원, 아그라성, 타지마할, 그리고 이곳 나란다불교대학까지 4군데를 보게 된다.
지난 번 인도 여행에서는 아그라성과 타지마할 외에도 델리 꾸틉미나르, 자이푸르 잔타르 만타르, 라자스탄 힐포드, 카주라호 사원들을 봤었다. 이번 여행에서도 델리 꾸뜹미나르 같은 곳은 볼 시간이 있을 것 같은데 포함되지 않았다. 아잔타나 엘로라 석굴, 산치 유적 같은 불교 유적들은 꼭 보고 싶은 곳인데 언제든 가볼 기회가 있을까나!
웅대한 규모의 나란다대학
나란다는 연꽃이 많은 곳이라는 뜻. 기원전 3세기부터 사원이 있었고, 5세기 굽타왕조 시절 대규모로 번성해 서기 12세기까지 오랜 기간 승려 들의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았다. 구법승 현장의 기록으로는 나란다대학 전성기 때 교수 천명에 학승 1만명 이상이 공부했다는 곳.
나란다대학은 길이 11km, 폭 5km 로 현재 발굴된 유적의 10배 규모가 아직 땅속에 묻혀 있다고 한다. 제대로 발굴이 끝나면 대단한 유적지가 되겠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유적지 건물들 규모가 대단하다. 대규모 인원이 식사할 수 있는 식당이나 기숙사 시설들을 보면 지금의 대학처럼 제대로 기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왕오천축국전을 지은 혜초스님이 수행했던 공간 등 이것저것 설명을 들으며 돌았는데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네. 그런데 신라시대 혜초스님은 어떻게 이 먼 인도까지 와서 공부를 할 수 있었을까? 당시 강대국이었던 당나라 황제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유학을 떠났던 현장과는 여건이 또 다르고 훨씬 불리했을 거다. 그런 현장도 한 마디로 개고생을 하며 겨우 천축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혜초는 오죽했으랴.
그 먼 길을 오롯이 두 발로 사막과 열사의 폭염 속을 걸어야 하고, 수 많은 도적떼들도 만났을 게다, 국가에서 유학비용을 대는 것도 아니고 카드나 달러가 있는 것도 아니니 여비도 없이 탁발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 하면서 엄청 걸었을 것. 잘 알지도 못 했을 천축이라는 동경의 대상을 향해 걸었을 스님의 그 열정과 용기는 그냥 신화 수준.
이곳 나란다대학에는 사리불존자의 사리탑이 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사리자(舍利子), 사리불존자. 부처님 입멸 전에 먼저 입적한 지혜제일 사리불존자 사리탑은 아소카왕 때부터 조성을 시작해 9세기까지 계속 보완되었다고 한다.
나란다는 바로 사리불 존자의 고향. 친구 사이였던 사리불과 목건련은 부처님의 애제자였고, 부처님보다 세상을 먼저 떠나 부처님이 “사리자는 죽었다, 사리자는 죽었다”하며 애석해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삼장법사 현장이 방문했을 때(640년)만 해도 전 세계에서 모여든 1만명의 학승들이 공부하고 있었고 부처님 사리탑도 있었다는 것. 그러나 13세기 침공한 이슬람은 철저한 문화말살 정책으로 수도승들을 모두 죽이고 나란다대학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만다. 당시 시설과 도서관 도서가 불타는데 6개월이나 걸렸을 정도로 규모가 장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자료들이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인류문화의 보고였을 텐데 정말 아쉽다. 폐허가 된 나란다대학은 1861년 영국 고고학자 커닝햄이 현장의 대당서역기를 참조해 유적지를 발굴할 때까지 그대로 잊혀진 역사가 되고 말았다.
나란다대학 순례를 마치고, 1시 50분 비하르 주도 파트나(Patna)로 출발. 3시간 정도 걸린다. 파트나는 인구 60만 정도 되는 큰 도시로 마우리아왕조, 굽타왕조의 수도였던 곳.
비하르지역은 깨달음의 성지 보드가야가 있고 라즈기르, 바이샬리 등 부처님 교화의 중심지였던 곳. 부처님 당시에는 북인도 권력과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으나 지금은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라고 한다. 주 면적은 남한보다 작은데 인구는 1억 2천이 넘고, 주 산업이 농업이라니 살기가 팍팍할 수밖에 없겠다.
파트나에 들어서니 힌두교 축제 참여 하는 인파와 확성기 소리로 요란하다. 일몰 일출 때 기도하는 의식. 이것이 바로 태양신을 숭배하는 차스 즉 수르야 뿌자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 힌두교 축제는 여인들이 주로 참석하는 의식으로 맨발로 아이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가는 여인네들이 계속 이어진다.
길가 상점 앞에서 지나는 사람에게 커다란 자몽을 하나씩 나눠주는 곳도 있는데, 원래 이 축제가 감사 표시로 과일이나 야채를 바치면서 축복을 기원하는 의식.
화려하고 쭉쭉빵빵한 꼭 게임 모델 같은 여신상을 크게 만들어 여기저기 장식 아니 모셔 놓았는데 아마 축제를 기념해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여신상 모습이 특이해 버스 안에서 핸드폰을 열심히 들이댔는데 달리는 차안이라 역시 제대로 찍히지 않았다.
'그래도 넌 나한테 팍 찍혔어! 누군진 잘 모르지만'
호텔 들어가면서 보니 호텔 앞 큰 길 차도에 강으로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이 계속 이어진다. 갠지즈강까지 4~5Km 거리라는데 차를 타고 가기도 하지만 맨발로 걸어서 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딸 하나는 안고, 하나는 손을 잡고 맨발로 도로를 걸어서 가는 세 모녀를 보면서 걱정이 들 정도. 남편이 같이 가는 것도 아니고, 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딸은 걸리고 더 어린아이는 안고 왕복 10km나 되는 길을 기도하러 맨발로 다녀 온다고?
어릴 때부터 신에게 절대충성 하라고 세뇌시키는 것인지, 극기훈련도 아니고, 그런데 그런 게 여기서는 당연한가 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게, 인도라는 나라, 여자는 정말 불쌍한 존재들.
인도인 80% 이상이 힌두교 신자. 힌두교는 종교이면서 생활이고 관습이라 모든 생활을 규정한다. 종교에 의존하고 그 가르침 대로 생활하는 것. 거기엔 사고는 필요 없고 맹신만 존재한다. 하긴 종교라는 게 원래 그런 건지도 모르지. 큰돌에게 기도하던 사람들에게 합리적인 사유가 필요했을까, 인간 지성이 발달되면서 그 큰돌이 보이지 않는 존재로 진화했을 것.
가이드는 “인도는 3억 4천의 신이 있는 신의 나라”라고 인도의 종교를 설명한다. 바보야, 뭐든 많으면 좋은 줄 아냐? 근데 전에 인도문화 관련 강좌 들을 때 강사 분 얘기. 3억 4천 신을 누가 세어 봤을까요? 그리고 3억 4천까지 숫자만 세어도 몇 년 걸리고 헷갈려서 그걸 셀 수 있는 사람은 없단다.
인도 인구가 3억 4천정도 일 때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신이 있고 부처님이 있으니 인구수만큼 3억 4천의 신이라 표현 했겠지. 많은 사람들이 그걸 그대로 인도에는 3억 4천의 신이 있다고 열심히 읊어댄다.
호텔에 들어서 현지 여행사 핀투 사장에게 저기 축제장소에 가봐도 좋으냐고 물었더니 사람들이 너무 많아 위험하니까 가지 않는 게 좋겠단다. 하긴 축제 때 걸핏하면 수십 명씩 압사사고로 죽는 나라인데, 굳이 갈 필요 없겠다 싶어 호텔 앞에서 오가는 인파들만 구경하다 철수. 일행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같이 가봤을 텐데 아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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