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인도성지순례

[인도 성지순례(16)] 일곱째 날 –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마야데비사원), 슈라바스티(기원정사)

카페인1112 2020. 12. 27. 20:12

[인도성지순례 일곱째 날 ]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의 새벽 마야데비사원과 구룡못,

다시 국경 넘어 슈라바스티로 (11/4()

 

 

  성지순례 7일차, 오늘은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에서 슈라바스티(사위성) 들러 럭나우까지 간다. 갈 길이 머니 새벽부터 부지런히 서둘러야 하는 것. 새벽 일찍 일정을 시작하는데 역시 짙은 안개숲, 안개 속의 산책이 된다.

 

  히말라야 남쪽 네팔 남동부 평원의 부처님 탄생성지 룸비니. 8대 성지 중 유일하게 인도가 아닌 네팔 땅. 어렸을 때부터 들어 익숙했던 이름이고, 룸비니 하면 뭔가 평화롭고 아름다운 낙원일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경전에 나오는 대로 '수목이 울창해 온갖 꽃이 피고, 아름다운 새들이 노래하고, 맑은 시내가 흐르는' 아름다운 동산이어야 하는데, 여기 와보니 세월이 너무 흘러서일까 그냥 평범하다. 

 

 

  탄생성지 룸비니

 

  기원전 623년(2천 6백년전)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곳 룸비니 동산에서 카빌라바스투 정반왕(슛도다나왕)과 마야 왕비의 장자로 태어났다. 카필라바스투는 당시 300여 개나 되었던 인도 도시국가 중 하나로 히말라야 기슭 샤카족의 작은 나라.

 

  어머니인 마야부인은 여섯 개의 상아를 가진 흰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왕자를 잉태한다. 출산 때가 되어 당시의 풍습대로 친정인 콜리족 데바다하로 가던 중 룸비니동산에서 진통을 느껴 무우수 가지를 잡고 선 채로 오른쪽 옆구리로 왕자를 낳는다.

 

  정반왕은 아들 이름을 싯다르타라고 지어 '고타마 싯다르타', 성(姓)인 고타마는 '가장 좋은 소'라는 뜻이고, 이름인 싯다르타는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미.

 

델리박물관 소장 붓다의 탄생 (9c. 나란다 출토)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혹자는 제왕절개수술로 낳았다는 것이라 하기도 한다만, 농담이겠지 그 시절에 무슨 제왕절개 수술 그것도 길바닥에서, 카스트가 크샤트리아 계급이라는 상징일 것.

 

  혹시 또 모르지. 부처님을 신격화 시키다 보니, ‘천상 천하에서 오직 나 홀로 존귀한 깨달은 존재(천상천하 유아독존)’ 성스러운 부처님을 (당시 시각대로) 어찌 부정한 여자의 자궁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나, 옆구리로 바꾸자 이렇게 됐을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였으면 부처님은 아마도 하늘에서 내려온 '금색 알'에서 나왔을 거다.

 

  부처님은 이렇게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생애를 보내는 그 위대한 여정을 시작하게 된 것.

 

룸비니 마야데비사원

 

 

  출생성지 룸비니는 아소카왕을 비롯해 많은 신자들의 순례성지가 되었으나 15세기 이후 순례자도 없어지고 오랜 세월 폐허로 방치되게 된다. 마야데비사원까지 없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동산' 룸비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오랜 세월 완전히 잊혀졌던 룸비니 탄생성지는 19세기 말, 한 독일인이 산 기슭에서 땅속에 묻혀 있던 아소카 석주를 발견하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알려지기 시작한다. 룸비니 확인된 게 겨우 백년 조금 지난 것.

 

  영국 식민지 시절, 유럽 고고학자들은 붓다의 유적을 찾아 인도북부 지역을 뒤지고 다녔다. 1895년 독일 고고학자 휠러가 땅속에 묻혀 있던 아소카 석주를 발견하면서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가 확인되고 부처님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다는 증거가 된 것.

  당시만 해도 학자들은 부처님이 실존인물이 아니라거나 여러 명의 수행자들을 일컫는 명칭이라는 등 여러 가지 주장을 했는데(기원 후까지 경전이 성립되었으니 그렇게 주장할 만도 하다)  이 석주 기록이 부처님 생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된다.

 

  1943년 룸비니 발굴현장에 마야데비 사원이 다시 세워지게 되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호텔에서 출발 대기, 새벽안개가 자욱했다.

 

  새벽 일찍 룸비니 마야데비 사원으로 간다. 호텔 로비에 일행들이 몰려 있어 보니 소원등 구매하는 것. 순례단에 동참한 어느 비구니 스님이 준비해 왔다고 하는데 소원등 하나에 10. 모두들 등 구입하느라 여념이 없으니 그 대열에 동참해 10불을 꺼내 들게 되네.

 

  큰 금액이 아니니 룸비니 온 기념 이벤트! 게다 '소원성취 발원'이라니... 탄생성지에서 겨우 10불 투자하고 소원성취! 아! 근데 소원 말하는 걸 그만 잊어 버렸다. 부처님이 알아서 챙겨 주시겠지.

 

 

  소원등 높이 들고 룸비니 게이트(아치형 출입구) 지나 새벽을 걸어 사원 입구 도착, 역시 맨발로 가야 하니 신발장에 신발을 벗어 놓고 마야데비 사원으로 입장. 바닥은 축축하고 이슬에 젖어 발 딛는 감촉이 별로 기분 좋지는 않았다. 신발 벗는 건 딱 질색! 두꺼운 덧버선을 준비 했어야 했어.

 

   혹시라도, 부처님은 평생 맨발로 다니셨다는 둥, 그 정도 감수하지 않을 거면 순례 오지 말고 집에 있으라는 등 그 따우 잘난 소리는 하지 마시라, 나도 너 정도는 배울 만큼 배웠고, 나이 들 만큼 들었고, 그 정도는 아는 사람이니. 싫은 건 싫은 거다.

 

안개 속을 요런 폼으로, 한 손을 들고 걸었다

 

  입구 검색하는 곳 통과 안개 속을 걷고 있는데 내가 카메라를 메고 있는 걸 본 다른 차 인도 가이드,

  “카메라 갖고 들어가면 2불 내야 합니다”라고 큰소리로 외쳐 댄다. 이 자식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목소리가 엄청 크네. 큰 죄 지은 줄 알고 가슴이 철렁 했다.

  나도 모르게 확 짜증이 나 아니 이미 들어왔는데 어쩌라고!” 하고 같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니 이 웃기는 짜장아, 그럼 내가 저기로 다시 돌아가서 돈 내고 오란 말야하는 욕은 속으로만 하고 말았다. 근데 부처님 탄생성지에 와서 짜증은, 이건 아니지. 니들한테 2불 못 뜯겨서 쪼매 미안타.

 

 

  마야데비사원과 구룡못

 

  먼저 흰색 사각형 건물 마야데비사원 안으로 들어간다. 부처님 탄생지에 1,943년 복원하고 이후 재건축된 마야데비사원. 발굴현장에 사원을 세워 안에는 발굴된 유적 구조물이 유리 아래 그대로 드러나 있고 앞 부분에 마야 부인상(탄생상)이 걸려 있다. 돌 조각 하나 더 있고 딱 거기까지. 즉 볼 게 없다는 야그. (내부는 사진 촬영 불가)

 

사원 입장했다 나와 아쇼카석주 부근

 

  이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이 사원 건물은 어떤 의미, 어떤 유래일까? 동아시아 같으면 유려한 처마에 기와를 올렸을 거고,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관련된 자료는 발견 불가. 이 사원도 한동안 힌두교 사원으로 사용했다고 하니 혹시라도 힌두교 양식일까?

 

  과거 불교가 성했을 때 탄생성지에 건립한 사원은 현재와 같은 같은 규모나 형태는 아니었을 것. 제대로 복원도, 개발도 되지 않은 부처님 탄생성지.

  하지만 성지순례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이 자리를 다녀가는 것만으로 족하다.

 

아직은 어두운 새벽, 구룡못 가에 소원등 진열하고 대기

 

   마야데비사원 탄생상 바로 아래 유리 밑에 구멍 패인 돌 조각이 있는데 룸비니 지역을 발굴하다 발견된 부처님 발자국이란다.

  그러니까 무우수 아래에서 마야부인 옆구리로 태어난 아기 부처님이

 

     한 손은 하늘을, 한 손은 땅을 가리키고,

     일곱 걸음을 걷고 (일곱 걸음 이건 육도윤회를 벗어난 걸 의미한단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외쳤는데 (부처님 탄생게),

 

  그 때 아기 부처님이 콱 밟은 발자국이라 이거지. 근데 아기공룡 둘리도 아니고 아기 발자국 치고는 구멍이 너무 커. 게다 돌에 구멍을 낼 정도로 울트라 슈퍼 파워 부처님!

 

  일휴 스님 말씀, “아니 태어나자마자 걷는 누우도 아니고 태어나서 무슨 걸음을 걷고 발자국을 남겼다고, 상징으로 봐야 해요”  그 당연한 상징을 실제상황으로 만드는 저 용감한 사기꾼들 덕분에 감동으로  '합장공경' 하는 순진한 보살님들까지 나온다. 근데 몇 년전 순례 온 사람들한테는 '부처님 발자국 모양 돌'이라고 설명했다는데 이 친구들 사기가 대폭 진화 했네.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에서 아기부처님이 태어나자 마자 걷고 말하는 위대한 존재로 만들려고 했던 건 아마도 힌두교처럼 신을 믿는 주변 종교들과 경쟁하다 보니 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어쩔 수 없었을 게다.

 

  “우리 부처님이 니들이 믿는 신보다 끗발이 훨씬 높아. 아기 때부터 차원이 달랐어

 

  이런 대중성 확보 차원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분명 기억해야 한다. 고타마 싯타르타는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覺者)이 되었고 석가모니라 불리게 된 것. 석가모니는 '석가족의 성자'라는 뜻. 즉 당연하게 신이 아니라는 것.

 

 

 

 

  마야데비사원 안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는데 아직은 어둡다. 해가 뜨려면 한참 더 있어야겠다. 구룡못 가에 소원등 죽 진열해 놓고, 스님들 의식 준비하는 것 기다리며 잠시 대기.

 

  사원 바로 옆에 아쇼카석주가 보인다. 말상을 올려놓은 아소카석주는 생각보다는 그 크기가 작았다. 돌기둥(석주)에는 아소카왕이 재위 20년에 부처님이 태어난 이 곳을 찾아 참배했으며 룸비니 마을의 세금을 1/8만 징수한다는 내용 등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기원전 269~232). 그는 통일과정에 있었던 참혹한 전쟁 참회하면서 불교에 귀의 하고 불교 성지를 순례하게 된다.

  그런데 부처님 입멸 후 몇 백년 되지도 않았는데 부처님 성지가 이미 가물가물 정확한 위치 확인이 어려웠던 거라. 더구나 당시는 기록을 하던 시절이 아니었으니 더 했겠지. 아소카왕은 촌노들한테 확인하고 자취를 찾아 부처님 성지마다 석주를 세우고 거기에 자세하게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다.

 

  덕분에 부처님과 연관된 정확한 위치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아쇼카왕 아니었으면 부처님이 역사적 인물이 아닌 신화 속 인물이 됐을 지도 모르는 일.

 

구룡못 가에 있는 보리수 신목, 힌두들이 나무를 돌며 기도를 하고 있다.

 

   남쪽에 안개에 쌓인 4각형 연못이 보인다. 이 연못이 바로 마야부인이 출산 전 목욕을 했고 용이 아기 부처님을 씻겼다는 구룡못(푸스카르니 연못). 못가에 소원등을 죽 진열해 놓았다. 근데 이 구룡못, 실제 근거가 있을까?

 

  연못 저편에는 오래 된 보리수 고목이 하나 있는데 사람들이 거기에 몰려 합장 하는 걸 보니 뭔가 의미 있는 신목인가 보다. 나무 둥치 사이에 있는 상징물은 남근 형상의 힌두교 링가 같은데, 그럼 아까 나무를 돌며 기도했던 사람들은 힌두교 신자들이었나 보다.

 

  오래 된 고목이나 큰 돌에 대고 기도하는 건 우리나 그대들이나 피장파장이네!

 

날 밝고 나서 찍은 사진, 시바신 상징인 남근형태 링가(?)

 

  부처님의 일생을 그린 팔상도 비람강생상(毘濫降生相)을 보면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은 나무 아래서 나뭇가지를 잡고 선 채로 겨드랑이에서 부처님을 낳는 모습. 이 나무가 바로 근심할 것이 없다 하여 무우수라 불렸던 것. 부처님과 연관된 3대 성수(聖樹) 중 하나인 무우수는 일명 아쇼카나무.

 

  * 불교의 3대 성수(聖樹): 룸비니 무우수(無憂樹), 보드가야 보리수(菩提樹), 쿠시나가르 사라수(沙羅樹)

 

  그 무우수야 당연히 지금은 없어졌고 저 나무는 그냥 보리수. 성지순례 자료집 보니 마야부인이 아기부처님 출산 시 잡았던 무우수나무라고 소개했는데 그냥 막 갖다 붙인 것. <대당서역기> 현장스님이 633년 룸비니를 찾았을 때에도 석주와 탑만 남아 있고 무우수나무는 이미 없어졌다고 한다.

 

  하긴 어느 승려 하나는 성지순례기에 "부처님이 태어나신 무우수 나무와 연못을 보니 감동으로 눈물이 펑펑 나왔다" 라던가. 이러니 쟤들까지 자꾸 사기 칠려구 하지. 팔정도의 정견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사원 옆에서 함께 예불 올리고, 다시 호텔로 돌아간다. 종합예술 영산재 의식 집전하는 스님 일행들과 함께 하니, 예불의식이 다채롭고 장엄하다. 역시 의식이라는 건 제대로 양념 역할을 하네. 좋은 경험!

 

  근데 감동까지는 아니라도 뭔가 울림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맹숭맹숭 한 걸 보면 역시 난 신심이 없나봐. 이렇게 짧은 시간 머물고 부처님 탄생성지 룸비니를 떠난다.

 

 

어느 나라 승려들일까? 경건한 아침 법회, 우측은 여성수행자들인데 가사를 입지 못 했다.

 

 

  불교의 길과 부처님의 길을 떠올리며

 

   합장 한번 하고, 탄생성지에서 호텔로 돌아가는 길, 문득 불교라는 종교 과연 깨달음의 종교인가 기복의 종교인가 다시 생각해 본다. 당나라 현장과 신앙심이 투철했던 실크로드 고창국 국왕과의 일화도 떠오르고. 부처님의 길과 불교의 길, 그게 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호텔로 돌아가는 길, 아직 안개가 자욱하다.

 

 

  호텔로 돌아와 버스 타고 다시 국경을 넘어 부처님 교화의 중심지 스라바스티(사위성)로 이동한다. 룸비니 호텔에서 7시 37분 출발,

 

  부처님 탄생성지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짧았네. 새벽 안개 속에서 본 룸비니는 유적지에 세워진 마야데비사원, 석주, 구룡못이 전부였다. 순례의 의미가 물론 작진 않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건 여기까지.

 

  아쉽게도 부처님이 자란 카필라성과 부처님 외가 콜리족이 세운 랑그람 사리탑도 인연이 닿지 않았다. 성지순례인데 자꾸 관광객 모드로 바뀌어 욕심을 부리게 되네.

 

소날리, 인도와 네팔 국경

   네팔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 거의 인도와 비슷한데 조금 더 시골스럽다고나 할까. 국경까지는 1시간 거리.

 

   네팔 국경도시에서 인도로 들어가기 위해 역시 국경에서 기약 없이 한참을 대기한다. 소날리 인도 국경사무소 도장 찍는 사람은 하나인데 입국자들이 워낙 많으니 그냥 그냥 시간이 가는 것. 악명 높은 인도 입국사무소, 여긴 급행료도 없나?

 

 

   차에서 대기하다 내려서 주변 구경하고 왔다리 갔다리 한다. 네팔로 갈 때는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이곳 국경지역 의외로 번화하다. 주변은 노점상, 구걸하는 아이들로 복잡. 주변 상가에서 운동화 사오는 사람도 있고, 군것질 거리 사기도 하고, 과일도 사고 그렇게 시간들을 보낸다.

 

  길 건너 꼬마들 재롱이 한창인데, 4~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길바닥에 드러눕고 강짜가 보통이 아니다. 땅콩 파는 데 가서 손을 벌리니 주인이 꼼짝 못하고 한 주먹 준다.

 

  국경 수속을 마치고 이제 부처님이 가장 많은 안거를 했다는 교화의 중심지 스라바스티(사위성) 기원정사로 간다. 기원정사는 국경서 170km 거리인데 소요 시간은 예측 불가. 가봐야 안다. 도로 사정도, 버스 상태도 그러니까.

 

  기원정사 보고 다시 럭나우로 가서 거기서 1박 예정. 오늘 차 타는 시간만 10시간이 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