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기록/공주의 산하

공주 공산성 한바퀴 돌기

카페인1112 2009. 10. 26. 21:40

공주 공산성 - 가을날 공주 명소 공산성 한바퀴 돌기

 

* 금서루 아래 공산성주차장(16:05)~공북루(16:20)~영은사(16:27)~영동루(16:56)~진남루(17:06)~쌍수정(17:12)~금서루(17:21)~주차장(17:25)  <놀며 놀며 1시간 20분>

 

 

공주 공산성(公山城) 은 옛 백제왕국 왕성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침공한 고구려군에게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포로로 잡혀 살해되자 문주왕은 475년(문주왕 원년) 강력한 고구려군의 압박을 피해 이곳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다.

 

이후 웅진은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에 이어 성왕이 넓은 사비성으로 천도할 때까지 63년간 대백제의 수도. 문주왕 당시 크게 국력이 위축되었던 백제는 이곳 웅진백제 시절 국력을 회복하고 무령왕릉 유물에서 보듯이 화려한 백제문화를 꽃 피우게 된다. 동성왕 때는 강력한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중국 산뚱지방까지 진출했고, 무령왕 시절에는 고구려 공격에 나설 정도로 자신감을 회복한다.

 

 

주차장에서 보는 금서루

         

 

오늘 답사는 이곳 공산성 성벽(총 둘레 2660m)을 따라 한 바퀴 도는 것. 공산성은 앞에 금강이 흐르고 뒤에는 절벽으로 되어 있어 방어하기에 용이한 천혜의 요새. 금강교를 지나 공산성 금서루 아래 주차장에 주차하고 오늘 답사 출발. 

 

주차장에는 영화 공산성의 혈투촬영장소였다는 안내문이 보인다. 초등학교 때 그 영화를 본 기억은 나는데 별로 기억나는 장면이 없다. 사실 그때부터 한동안 공산성은 공주산성의 준말인 줄로만 알았다. 나중에서야 산의 모양이 공()자와 비슷해 공산이라 했고 산성의 이름을 공산성이라 했다는 것을 알았다.

 

공주의 지명도 熊津(웅진)을 거쳐 熊州, 이후 공주로 바뀐다. 왜 공주라 했는지 그 유래가 궁금했는데 청화산인 이중환의 택리지를 보니 공산의 ()을 따 공주라 했다는 설명이 나온다.

 

 

  

 

불망비를 지나 금서루로 올라선다. 이곳 금서루는 1993년 복원되었으니 어릴 때 놀러 다닐 때는 없었던 누각. 금서루에 올라 금강 방향으로 성벽을 따라 걷는다. 곧 금강이 보이는 시원한 조망.

 

계속 성벽을 따라 가니 공북루. 1603(선조 36) 세웠고 금강에서 성 안으로 들어오는 문 위에 세운 누각이니 중요한 교통의 길목이었던 셈. 어릴 때는 이 곳이 야유회 장소였다.

 

                              <공산성 입구 거창한 벼슬아치들 영세불망비 모음>

 

 

 

 

  금서루 주변 황색 깃발. 황색은 백제를 상징하는 색이고 깃발 안의 그림은  송산리 고분군 벽화의 사신도를 재현했다고 한다. 백제군은 이 황색 깃발을 들고 전투에 나섰을까?

 

                                <금서루에서 금강 방향으로 성벽을 따라>

 

 

                                <성벽 조망대에서 보는 금강>

 

 

                                 <공북루>

 

 

 

곧 연하루에 이르게 되고 바로 옆에 영규대사가 승병을 훈련시켰다는 영은사가 있다. 늦가을 영은사 앞 큰 은행나무 잎이 모두 떨어져 둥근 원을 그렸을 때 그 모습이 그리도 아름다웠는데...

 

만하루가 복원되기 전 이곳 강가는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아침 물안개를 보며 합장했던 곳. 영은사와 금강가 그 추억의 친구들이 그립다.

 

                              <영은사>

 

 

                                 <만하루와 연지>

 

 

성벽을 따라 계속 걸으니 공사중인 광복루와 임류각을 지나고 곧 동쪽으로 월성산 봉수대와 주미산으로 이어지는 공주 동쪽을 감싸 안은 긴 산줄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곧 동문인 영동루, 이 것도 1993년 복원된 것. 영동루를 지나니 임류각터 표지가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 왕성 남쪽에 지었다는 건물. 동성왕은 국력이 팽창되면서 화려한 임류각을 지었고 파벌싸움에 의해 신하들에게 제거되고 만다.

 

 

 

 

                                  <영동루>

 

 

                                <동성왕 때 건립했다는 호화연회장 임류각 터>

 

 

임류각터를 둘러보고 진남루로 향한다. 이 진남루는 어렸을 때부터 익숙한 곳. 이 문을 지나 영은사, 광복루, 공북루 참 많이도 다닌 곳. 진남루를 지나니 곧 쌍수정 아래 광장으로 연결된다.

 

광장에는 관광객과 도토리 줍는 사람들로 인산인해. 쌍수정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까지 도망친 인조의 일화가 전해지는 곳. 쌍수정 아래 쌍수정과 인절미유래 안내판이 보인다.

 

 

                               <남쪽 문 진남루>

 

 

                                <쌍수정>

 

 

                                  <추정 백제 왕궁터란다>

 

 

쌍수정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까지 도망쳐 왔던 인조가 승전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 옆에 있던 나무에 정3품 높은 벼슬을 내렸다는 곳. 정치를 잘 했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고, 지들끼리 싸우다 도망쳐 나무에 벼슬이나 내렸으니 웃기는 짜장면.

 

인절미는 당시 우성면의 임씨가 왕에게 진상한 떡이 너무 맛있어 임씨의 절미인 임절미(뒤에 인절미로 변화)라 했다는 것. (전에는 공민왕으로 알고 있었는데 전설 따라 삼천리인가?)

 

그런데 광장에 있는 추정왕궁지라는 말이 맞는 것일까? 추정 왕궁의 전각터라면 모를까 강대한 대백제의 왕궁지를 그 정도로 작게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사극을 생각해도 이해가 어렵다.

 

 

 

 

광장에서 한참 놀다가 다시 성벽을 따라 금서루에 도착, 어릴 때 그리운 추억, 그리운 사람들의 공산성 한 바퀴 돌기마무리하고 귀가

 

<다시 금서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