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정맥 산행/백두대간 산행

지리산(성삼재에서 중산리까지)②

카페인1112 2005. 8. 27. 22:30

<둘째 날, 8월 14일(일)>

 

* 세석대피소(6:15)~장터목대피소(7:42)~제석봉(8:10)~천왕봉(8:47~9:08)~망바

  위(10:47)~중산리(11:40)   <5시간  25분, 여유 있게>

 

<세석대피소> 부족한 잠 탓이었을까 불편한 잠자리인데도 어느새 깊은 잠에 빠졌던가 보다. 그런데 잠결에 거센 파도소리가 들려오더니 시원한 바람이 느껴진다. 눈을 떠보니 흐린 하늘 속에 수 없이 빛나는 별들이 가득하다. 여름날 무섭게 쏟아지던 별빛이 아닌, 은은하고 신비롭게 빛나는 별빛이다. 그 고운 별빛들과 함께 수 없이 떠오르는 상념들, 얼굴들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밤을 지새운다.

 

새벽이 되면서 일찍 출발해 천왕봉 일출을 볼까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힘들어하는 일행들에게는 무리, 다음 기회를 보기로 한다. 언젠가 이 장엄한 풍광, 시원한 바람, 고운 별빛들이 그리워 다시 오게 될 테니까. 아침 준비를 하는데 산악회 가이드는 서둘러 달라고 요청한다. 우리가 너무 늦어질까 불안한 모양이다. 급하게 라면을 끓여 아침을 먹고 먼저 출발한다. 일행 둘은 천왕봉은 자신 없고 노루목에서 바로 중산리로 하산하겠다고 한다.

 

세석대피소를 떠나며 뒤를 돌아보니 대피소 건물과 주변 산세들이 제대로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풍경이다. 봄철 붉은 철쭉으로 가슴 저미게 할 세석평전. 주변 바위지대들이 이국적인 풍경을 보여 주변을 한참 돌아보다 간다. 세석평전을 지나니 이제부터 산길, 숲의 향기로 빠져들게 된다. 주변에는 청초한 산구절초, 노란 물레나물, 분홍색 둥근이질풀 등 산상화원.

 

싱싱한 아침 숲길을 걸으니 꽤나 상쾌한 기분, 하지만 잠시뿐 조금씩 더워지기 시작한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어 자외선차단제를 듬뿍 발랐지만 곧 땀이 흐리기 시작해 무용지물. 어느덧 연하봉(1,730m)을 지나 사람들로 번잡한 장터목대피소 도착. 장터목은 북쪽 백무동에서 올라온 남원 함양 사람들과 남쪽 중산리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물물교환을 했다는 곳. 앞 산줄기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 꿈틀거린다.

매점에 뭐 먹을 게 없나 찾아보니 마땅한 것이 없다. 복숭아캔 하나 사서 배낭에 넣고 천왕봉으로 향하는데 이런, 목에 걸친 손수건이 없다. 다시 내려가는데 가이드가 보고 왜 내려오느냐고 묻는다. 손수건 얘기를 했더니 배낭 위에 걸쳐 있다고 얘기해 준다. 배낭 위에 걸쳐 있는 걸 모르고 헛걸음을 했다.

 

세석에서 천왕봉 가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 어느덧 옛날 산불로 인해 고사목들이 즐비한 제석봉(1,806m)을 지난다. 천왕봉은 1.1km, 구름에 둘러 쌓인 천왕봉이 가깝게 보인다. 이제 암릉지대 통천문을 지나 천왕봉으로 향한다. 하늘로 오르는 길, 이제 천왕봉은 지척이다. 암릉지대가 나오고 장엄한 천왕봉이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 오르는 천왕봉(1,915m), 나름대로 감동의 순간.

 

바위 정상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정상석이 있고 뒷면에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고 씌어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사진 한 장 찍기가 힘들 정도다. 날이 맑았으면 일망무제 시원한 조망이 트였을 텐데 오늘은 조망이 약하다. 그래도 사방으로 보이는 전망이야 장엄 그 자체, 감동적인 풍경에 내려가기가 싫다. 정상을 한참 즐기다 이제 중산리 방향으로 하산. 중산리까지 5.4km의 거리.

 

가파른 내리막길을 지나니 개선문(1,700m) 그리고 빨치산의 아지트였다는 법계사를 지난다. 지리산은 흙산이지만 하산 길은 거의 돌길이다. 게다 발까지 피곤하니 중산리까지의 5.4km가 왜 그리 멀게 느껴지는지 이제는 경치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여러 번 쉬면서 내려온다.

 

한참을 걸려 망바위를 지나 중산리 도착. 19시간 10분 걸린 이틀간의 산행을 마친다. 집결 지점인 음식점 사워장에서 차가운 물을 뒤집어 쓰니 좀 살 것 같은 기분이다. 일행들을 기다려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걱정이 될 정도로 영 오질 않는다. 1시간 넘게 기다리니 두 사람이 오는데 한 친구는 넋이 나간 표정이다.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지쳐 안쓰러울 정도.

옆에 앉은 사람이 음식을 기다리며 배 고파 죽겠네라며 음식을 독촉한다. 막걸리를 한 잔 권했더니 아침 4에 성삼재를 출발해 아무 것도 못 먹고 중산리까지 뛰어 왔단다. 아니, 9시간밖에 안 걸려 하산했다고? 아무리 산악 마라톤을 한다고 해도 너무 빠르다.

 

점심을 먹고 귀경 길, 그제 밤 출발했던 것이 먼 기억처럼 떠오른다. 짧은 시간 머물렀던 여름의 지리산, 중산리 하산 길의 고통까지도 오랫동안 기억되고 그 추억으로 행복하리라. 기대로 설레게 했던 지리산은 이제 그리움으로 남고 가슴 속에 또 다른 꿈을 꾸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