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사산(內四山) 줄기를 따라 서울성곽 순례- 한양 600년 역사의 숨결을 느끼며
* 산행지: 내사산 - 북악산(342m), 인왕산(338m), 낙산(125m), 남산( 262m)
* 산행일: 2010년 9월 26일 (일), 맑음
* 경로 및 시간: 숭례문(9:21)~돈의문터(9:51)~인왕산 들머리(10:22)~인왕산 정상(11:04) ~창의문
(11:42)~북악산 정상(12:23)~숙정문(12:50~13:02)~와룡공원(13:26~13:41) ~혜화문 (14:05)
~낙산공원(14:50)~동대문(15:08)~광희문(15:35)~남산공원입구(16:19)~남산타워(16:53)~백범광장
(17:15)~숭례문(17:25) <총 8시간 4분>
<김정호의 수선전도>
일요일 아침 서울성곽(사적 제10호) 순례를 위해 집을 나선다. 서울성곽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내사산(內四山) 줄기를 따라 쌓았고 이후 세종과 숙종 등이 개축한 총 길이 59,500자(약 18.2km)의 조선시대 도성(都城).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그 역사의 숨결 따라 걷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이 되리라.
내사산은 주산인 북악산(342m)과 좌청룡 우백호의 낙산(125m)과 인왕산(338m), 남주작의 목멱산(남산, 262m)을 말하고, 서울을 둘러싼 외사산(外四山)은 북한산과 행주산성이 있는 서쪽의 덕양산, 온달의 전설이 있는 동쪽의 아차산 그리고 남으로 관악산이다.
문화재청의 설명문(안내 팜프렛 자료)을 요약 인용하면 “1,392년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태조4년(1,395년) 완성되자 서울성곽을 수축하기 시작, 1396년 1,2월의 49일 동안 전국에서 11만 8천명을 동원 성곽의 대부분을 완공하였고, 가을 농한기인 8,9월 49일간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는 동시에 4대문과 4소문을 준공하였다. 그 후 27년이 지나 세종은 서울성곽을 전면 석성으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사업을 벌여 세종 4년(1,422년) 1월 겨울 농한기에 전국에서 약 32만 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자를 동원 완공하였다. 당시 서울 인구는 약 10만명”
* 4대문: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 4소문: 동북의 홍화문 (혜화문)·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
<종로구청 제작 서울성곽 지도>
오늘 걷는 코스는 숭례문에서 시작하여 인왕산, 북악산을 지나 동대문에서 남산을 거쳐 숭례문으로 돌아올 계획. 8시간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니 경사가 급한 인왕산 북악산을 초반에 오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시청역 8번 출구로 나와 숭례문 방향으로 향한다. 숭례문(崇禮門)은 4대문 중 하나로 남대문. 사대문(四大門)은 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북쪽의 숙정문(肅靖門)으로 유교의 덕목에 따라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넣어서 지었는데 북쪽의 숙정문은 음기가 세다 하여 맑을 청을 넣었다 한다.
<복원공사 중인 남대문>
한창 복원공사 중인 숭례문을 보고 대한상의 건물 앞에서 순례 길 출발. 옛 성벽 흔적이 있는 대한상의 옆 도로를 걸으니 서소문 고가도로가 있는 지점으로 연결된다. 고가 아래 횡단보도를 건너 순화빌딩 앞으로 가 서소문 터를 찾아본다. 서소문은 순화빌딩 부근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수렛골 표석만 있고 서소문 표식을 찾지 못한다. 평안교회 앞을 지나니 미국 아펜젤러 목사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 정동 터가 있고 옆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사인 독립신문사 터. 배재학당은 고종이 직접 이름을 지어 준 것이라고 한다.
<대한상의 옆길>
<옛 성곽의 흔적이 조금은~>
<서소문>
<배재학당 터>
<배재공원의 표석 - 배재학당, 남궁억 집터>
배재학당 터인 배재공원을 지나 정동 길로 향한다. 매일 아침 출근 길에 지나는 곳으로 걷기 좋은 거리.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100년이 넘은 정동제일교회를 둘러보고 유서 깊은 정동극장을 지난다.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이화학당을 둘러 보려고 하니 정문 경비가 제지한다. 유관순 빨래터가 궁금했는데 못 들어가게 하니 방법이 있나. 정문 옆 돌담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쌓았다는 안내문을 보니 예쁜 담장이 더 예뻐 보인다. 브라질 음식점인 이빠네마를 지나니 정동사거리.
<옛 배재학당 터에 있는 배재공원을 지나 정동길로>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정동제일교회>
<정동제일교회를 세운 아펜젤러 목사>
<이화여고 - 담장을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쌓았다고>
정동사거리에서 삼성병원 방향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니 길가 돈의문 터(1,422~1,915) 안내판이 보인다. 돈의문은 일제 강점기 철거됐다.서대문인 돈의문은 태조 5년 지금의 사직터널 부근에 세웠는데 세종 4년(1,422년) 현재의 위치에 성문을 쌓아 새문, 신문(新門)이라 불렸다 한다. 그래서 주변이 신문로. 전에는 새문안교회가 무슨 뜻인가 궁금했는데 새문(돈의문) 안에 있는 교회라 해서 그런 이름을 붙였나 보다.
<돈의문 터 안내문>
강북삼성병원 안 백범 김구 선생이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경교장으로 간다. 백범 선생이 해방 후 집무실 겸 숙소로 썼던 장소이고, 암살범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했던 곳. 그렇게 해서 민족지도자 한 분은 비명에 돌아가셨고, 그 분을 암살하게 한 배후세력들은 천수를 누린 것인가? 민족 비극의 한 현장...
경교장을 잠시 둘러보고 서울시 교육청 앞을 지나 성벽이 보이는 갈림길에서 우측 길을 택해서 오르니 봉선화, 고향의 봄 등 주옥 같이 아름다운 많은 곡을 작곡한 홍난파 가옥이 보인다. 뒤로는 인왕산의 수려한 암릉지대가 모습을 드러내고.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이 있으나 어릴 적 즐겨 불렀던 그 많은 곡을 만든 공이야 어디 가랴! 지난한 시대 상황에서 지조를 지키기가 어찌 쉬웠을까? 그래서 절개 굳은 사람들이 후세 추앙을 받는 것임은 당연한 것이고. 하지만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세를 돌아보고 입을 열어야 한다.
<백범 김구선생의 경교장>
<갈림길에서는 우측 길로>
<홍난파 가옥>
계속 진행하니 사직터널을 지나 권율장군 집터와 수령 420년의 은행나무(수고 23m)가 보인다. 그래서 주변 동명이 행촌동. 그런데 앞으로 가보니 길이 없다. 한참 두리번 거리다 뒤로 돌아와 삼거리슈퍼가 있는 삼거리에서 좌측 길, 양의문교회 방향으로 가니 옥경이식품 바로 앞에 인왕산 들머리가 보인다. 즉 성곽 길은 권율장군 집터에서 되돌아 나와야 하는 것. 경교장 앞에서부터 20대 나이로 보이는 젊은 친구들 셋이서 내 앞을 걷는다. 이들은 어디까지 갈 계획일까? 성곽순례 길을 걷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문화체험의 소중한 기회를 많은 사람이 같이 나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일.
<인왕산 공원 초입>
<성벽 옆길을 따라 인왕산으로>
<우측의 북악산과 좌측의 북한산 보현봉>
<성벽 너머 인왕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인왕산 공원 성벽을 따라 인왕산으로 향하는 길. 앞에 인왕산, 좌측으로는 안산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두 산 모두 화강암 지대라 기암괴석의 절경을 연출한다. 걷기 좋게 단장된 산책로에는 주황색 유홍초가 한창이다. 곧 인왕산길 포장도로에 올라서고 도로 건너 성곽 길을 따라 가면 범바위로 오르는 길. 그런데 철문이 닫혀 있고 복원공사 중이라 출입이 안 된단다.
인왕산 길을 따라 우측으로 5분 정도 걸으니 인왕산 들머리인 철문이 나온다. 이 길은 전에 인왕산 산행 시에도 걸었던 길. 가파른 길을 오르니 좌측에 해골바위가 모습을 드러낸다. 조금 더 오르니 다시 성곽 길과 합류되고 정상으로 향하는 길. 여전히 인왕산 산행객들이 많다.
<인왕산길에서 성곽따라 인왕산 범바위 오르는 길 - 지금은 공사중이라 출금>
<인왕산길을 5분 정도 걸어 인왕산 들머리 철문>
<해골바위>
<다시 성벽을 만나고>
가파른 길을 올라 수도 한양의 우백호인 인왕산 정상에 도착. 정상 삿갓바위 옆에 삼각점이 보인다. 인왕산은 산세가 웅장하고 아름다워 산수화의 소재가 되곤 했고 호랑이가 많아 태종 때에는 경복궁 내정까지 호랑이가 출몰했다고 하니 지금 이 작은 산이 그 때에는 그리도 크고 깊었던 것일까? 인구가 늘어나면서 숲은 축소되기 마련. 날이 비교적 맑아 사방으로 시원한 조망이 후련하다.
서울 시가지 배경으로 남산이 솟아 있고 지나온 성곽 길, 그리고 북악산으로 향하는 길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인왕산에 올 때마다 느끼지만 수려한 기차바위와 그 뒤로 보이는 북한산 보현봉 모습이 눈길을 떼기 힘들게 만든다. 기암괴석의 장관들.
<인왕산 정상 삿갓바위>
<한양 시가지와 남산>
<성벽 옆으로 수려한 기차바위, 뒤로 북한산>
정상에서 조금 내려와 좌측 기차바위가 보이는 곳으로 진행. 초소가 있는 곳에서 뒤돌아 보니 정상 아래 중종 임금과 단경왕후의 애절한 전설이 전해지는 치마바위가 수려한 모습을 드러낸다. 반정에 성공 왕이 되었으나 즉위 7일만에 반정공신들의 압력에 굴복 사랑했던 왕후를 폐하고 사가로 보내야 했던 중종. 왕비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중종은 누각에 올라 그녀의 사가가 있는 곳을 보며 그리워했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단경왕후는 집 뒤에 있는 바위에 즐겨 입던 분홍색 치마를 펼쳐 놓았다 한다. 그래서 그 바위가 치마바위. 중종은 병환이 깊어지자 단경왕후를 궁으로 불러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숨을 거둔다.
단경왕후의 아버지 신수근은 거사 직전 거사에 합류하라는 박원종의 요청을 거절, 거사 당일 죄인으로 제거되고 만다. 연산군 비 신씨가 바로 신수근의 누이. 만일 이 때 신수근이 거사에 합류했으면 반정공신이 되었을 게고 단경왕후도 무사했으리라. 결국 반정세력도 명분이야 어떻든 연산군의 학정이 문제가 아니라 정권을 잡기 위한 쿠데타였을 뿐이다. 광해군을 폐위한 인조반정도 마찬가지. 왕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잘못 말고는 비교적 유능한 왕이었던 광해군을 몰아냈던 인조와 서인들은 외교에 실패 결국 삼전도의 치욕을 겪에 된다.
<중종과 단경왕후의 애절한 전설이 있는 치마바위>
성벽을 따라 내려가니 길은 성밖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덕분에 제대로 성벽을 관찰한다. 다시 성안으로 들어서고 조금 더 가니 앞에 등로가 막혀 있고 우측 인왕산길 방향으로 하산하게 된다. 인왕산길을 따라 좌측으로 가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나온다. 여기서 다시 성곽과 합류. 성곽을 따라 잠시 걷다 다시 도로로 내려서 최규식 경무관 동상을 둘러보고 창의문으로 오른다.
<성밖으로 진행>
<성벽 따라 가지 못하고 우측 인왕산길로>
<윤동주 시인의 언덕>
<이제 창의문이 보인다>
<1.21 사태 당시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 동상>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으로 자하문이라는 별칭으로 불려 왔다고 한다. 인조반정 당시 공신들이 모였다는 곳으로, 반정을 하면서 반정군은 이 문을 통해 들어가 창덕궁을 장악했다고 한다. 문루에 인조반정 공신 이름이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오늘 처음으로 창의문 누각에 올라보고, 누각을 내려와 정면 모습을 둘러본다. 오늘은 그동안 제대로 보지 못했던 성곽 주변을 골고루 둘러볼 계획. 걷는 시간은 의미가 없다.
<창의문>
<인조반정 당시 공신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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