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성지순례] 둘째 날 ② - 초전법륜 성지 사르나트(녹야원) / 위대한 전법의 역사 출발점
보드가야에서 사르나트까지 250km나 되는 먼 길을 걸어온 부처님은 교진여등 다섯 비구를 만나 이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깨달음을 설한다. 중도와 사성제 법문을 듣고 아라한과를 얻은 이들 5명이 첫 불교신자이자 불교 교단의 시작. 위대한 전법의 역사가 시작된 것.
다섯 비구는 부처님 설법을 듣고 일주일만에 교진여를 시작으로 5명 모두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불(붓다), 법(진리)과 함께 '법을 깨달은' 상가(승)가 갖춰져, 불교의 불-법-승 3보가 성립된다.
아하 그렇구나. 다섯 비구가 부처님 법을 깨달아 상가(승가)가 되었구나. 승보는 법을 깨달은, 진리를 깨달은 사문을 말 하는 것.
그렇겠지, 강남 신사동 신밧드 단란주점에서 술 마신 중들(이들은 이후 아주 잘 나가는 조계종 유명인사다)이나 백양산관광호텔에서 노름 벌이다 뽀록 나 개망신 당한 조계종 중진이라는 중들이 승복 입었다고 승보가 아니라는 얘기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수행 끝에 깨달아 아라한과를 얻은 아라한, 아라한을 줄여 나한이라 부른다. 이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 제자들은 후대에 들어 신통력을 갖춘 절대자로 숭배의 대상이 된다.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주는, 소원을 들어주는 독특한 능력이 있다고 하여 많은 나한전이 생겨나게 된 것. 석가모니부처님과 16나한을 모신 응진전이나 부처님 입멸 후 경전결집에 참석했던 가섭존자를 비롯한 오백 명의 아라한(오백나한)을 모신 오백나한전이 대표적.
부처님 성지순례를 이곳 사르나트(녹야원)부터 시작한다. 부처님 4대 성지 중 하나인 사르나트. 부처님 초전법륜, 첫 설법지에 세운 탑이 바로 사르나트에 있는 다메크탑.
버스에서 내려 사르나트 초전법륜지로 간다. 유적지 입구 우측에 사르나트 고고학박물관이 있고 그 맞은 편에는 태국사원. 관광객들이 많아 사르나트 입구에서 잠시 대기.
4대 성지답게 여긴 세계 각국에서 모인 순례객들, 여행객들로 만원이다. 하얀 법복을 입은 스리랑카 순례객들이 가장 많이 보인다
도로에는 여기저기 지뢰밭, 소똥 천지다. 가이드 왈 “소똥 밟으면 재수가 좋아요”그래서 그 친구 재수 좋게 자비를 베풀려고 팔을 당겨 쇠똥 있는 곳으로 인도했다. 그랬더니 씩 웃으면서 ”전 많이 밟았거든요”
그런데 나중 생각하니 함부로 팔을 당겨 접촉한 것은 좀 문제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인인 나야 걔들이 볼 때 카스트에도 소속되지 않은 불가촉천민 수준이 아닐까? 카스트가 다르면 접촉 금지, 되게 미안한 짓을 했네.
인도를 무슨 대단한 성스러운 나라라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여성들 많은데, 걔들 속으로는 외국인 여자들 우습게 생각하고 함부로 대하려고 합니다. 걔들 기준으로는 가장 낮은 카스트인 데다 그 동네 아직은 여자들 제대로 대접 못 받아요. 성폭행 범죄 세계 1위 아닌가?
유적지 안으로 들어서니 우측 높게 초전법륜지에 세운 다메크탑이 서 있고, 기단만 남은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그 뒤로 부러진 아쇼카석주와 여래향실, 그리고 승원 터가 여기저기 보인다.
부처님께서 머물렀던 물라간다쿠티(물라간다는 향기, 꾸티는 방)는 향기가 가득한 방, 여래향실. 부처님이 계신 자리에는 사람들이 늘 꽃과 향을 공양해 향긋한 향 냄새가 났으므로 여래향실이라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부처님 여래향실은 이곳 사르나트 무라간다쿠티와 영취산 설법지, 기원정사 간다쿠티 세 군데.
기단만 남은 부처님 진신사리탑,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초전법륜지에 들어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는 둥근 기단부만 남아 있다. 처음 이 기단부를 봤을 때 건물 기단이 어찌 저렇게 둥글게 생겼을까 궁금했는데 부처님 진신사리탑이었던 것.
‘진리의 왕’이라는 뜻의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는 아쇼카대왕이 근본 7탑(근본 8탑 중에 한 곳만 제외)에 있던 부처님 사리를 꺼내 수천 군데 인도 전역에 봉안할 때 세워진 탑 중 하나로 13.5m 높이 규모의 큰 사리탑이었다고 한다. 13C 이슬람 탄압을 피해 수행자들은 이곳을 흙으로 덮고 피신한다.
둥근 언덕으로 남아 있던 스투파는 이후 더 황당한 상황을 겪어야 했다. 18세기(1794년) 이곳 바라나시 지역 토후 마하라자가 궁전을 짓는 벽돌로 쓰려고 그나마 남아 있던 탑을 해체해 버렸다고 한다.
그 때 탑 안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그게 뭔지 몰랐던 힌두교도들 사리함만 남기고 사리는 갠지즈 강에 버렸다. 그 사리함은 부근에 버려졌다가 커닝햄이 발굴하면서 회수되어 현재 뉴델리 국립박물관에 보관.
근데 정말 몰라서 버렸을까, 아니면 알면서도 이교도 사리라 그냥 버렸던 것일까? 부처님은 아마 이들 인도인들에게 오랫동안 잊혀지고 무시 당했던 존재일 것.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고.
7세기 당 현장이 사르나트에 왔을 때 1,500명의 승려가 거주하고 높이 100m 의 거대한 불탑, 거대한 아소카석주와 함께 수많은 불탑과 사원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8세기 혜초가 순례 왔을 때는 이미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하니 힌두교 번성과 함께 사르나트의 영화도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
그리고 이후 12세기 이슬람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어 사르나트 불교유적지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다.
후일 영국인 고고학자 커닝엄의 발굴로 초전법륜지가 밝혀졌고, 이때 발견된 아쇼카 석주 머리부분 네마리 사자상과 초전법륜상은 현재 사르나트고고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지금 인도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애지중지 하는 네마리 사자상까지도 오랜 세월 사르나트 폐허에 그냥 방치되어 있다가 영국인들이 겨우 주워 준 것.
초전법륜지 다메크탑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를 보고, 부처님 초전법륜지에 세워진 다메크탑으로 간다. 최초로 북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 아쇼카왕(기원전 269~232년)에 의해 처음 세워지고 이후 계속 증축된 것으로 전해지는 다메크탑은 높이 43.6m 흙으로 쌓아 올린 둥근 형상 굽타시대 양식의 스투파. 탑 옆면에 장식된 기하학적인 문양이나 꽃 장식도 당시 굽타왕조 시기 전형적인 장식 양식이라고 한다.
다메크는 산스크리트어로 법의 중계라는 뜻이고, 스투파는 흙으로 만든 무덤이라는 의미. 아쇼카왕이 세웠을 때는 규모가 작았는데 굽타왕조 시대 이래로 계속 증축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커닝엄의 사르나트 발굴 당시 다메크 스투파에서 6~7세기 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오래 된 석판이 발견되었는데, 그 석판에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겨나며, 인연이 다하면 사라진다. 이것이 나의 스승인 부처님의 가르침이네"라고 새겨져 있었다 한다.
다메크탑은 인도의 전통적인 둥그런 무덤 모양 반구형 탑, 네모난 기단과 봉분에 해당하는 둥근 그릇을 엎어 놓은 모양이다. 인도의 이런 탑 형식은 우리나라 탑 제작에도 영향을 미쳐 탑 상륜부에 봉분형 탑을 간략히 둥근 구조로 공예화 시켜 놓고 있다.
불교의 동아시아 전래와 함께 탑 숭배 신앙도 같이 전파되었고, 스투파는 중국에 와서 솔탑파, 탑파, 탑이 된다. 탑의 형태도 탑을 고층 누각 형태로 중국화 시켰고, 벽돌을 탑의 재료로 사용해 전탑이 주류. 우리나라는 중국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에는 법주사 팔상전과 같은 형태의 고층누각 목탑을 세웠고 이후 화강암이 많은 한국특성에 맞춰 석탑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다메크 탑을 돌면서 탑돌이를 하거나 오체투지를 하는 티벳 신자들, 모여 앉아 염불을 하는 사람들, 모여 설명을 듣고 있는 승려들, 주변에 참배객들이 꽤나 많았고 각자 자신들 방법으로 예불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들도 석가모니불 염송 하면서 탑돌이. 나야 그냥 구경만 했지만.
다메크탑을 보고 돌아나오는 길. 유적지 북쪽 철창 담 너머 숲에 사는 사슴공원 사슴떼 잠시 구경하고 내려온다. 녹야원 옛 명성 대로 사슴을 키우나 보다. 근데 어디선가 검은 개 한 마리 와서 덩달아 사슴구경 한다.
근데 인도는 소만 많은 게 아니다. 여기저기 풀어놓은 혹은 노상 개들이 엄청 많다. 덕분에 길에는 소똥 개똥 천지고. 하긴 우리나라도 요즘 개를 많이 키우다 보니 여기저기 개똥 천지더라!
그런데 물라간타 꾸티(Mulagandha kuti) 앞에서 어떤 인도인이 향을 내밀며 향 공양을 하라고 권유한다. 그런데 사실 이때는 물라간타 꾸티가 뭔지 몰랐다. 그냥 공양하라기에 부처님과 연관됐거니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이고. 나중에서야 여래향실이라는 걸 알았다. 부처님이 머무르시던 곳이라는 걸 알았으면 절이라도 했을 텐데 그냥 향만 하나 올렸네.
맨입으로는 안 될 것 같아 마침 지나가던 여행사 사장한테 “1불 주면 되나요?” 하고 물었더니 “과도하지요. 10바트만 줘도 되는데” 근데 뭐 잔돈이 없으니 1불 주고 마침 옆에 가던 다른 보살님 한 분까지 같이 향을 올린다. 사르나트 온 기념.
곧 아쇼카석주(Ashoka Pillar) 자리. BC250년 아쇼카왕이 세운 높이 15m 의 아소카석주는 몇 개 조각난 기둥만 유리 안에 전시되어 있다. 원래는 12m 높이 석주에 4마리 사자상이 올려져 있던 위풍당당한 포즈였을 텐데, 아직 복원을 해 놓지 않았다.
인도 미술품 대표작 아쇼카석주 머리부분 '4마리 사자상'은 현재 사르나트 고고학박물관에 전시. 사르나트 유적지를 나와 '네마리 사자상과 부처님 초전법륜상' 보러 바로 옆에 있는 사르나트 고고학박물관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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