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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성지순례 ⑦] 셋째 날 – 깨달음의 성지 ‘보드가야’로 (10/31일,목)

카페인1112 2020. 12. 27. 19:53

  바라나시에서 깨달음의 성지 보드가야로 - 니련선하(니란자라)와 수자타탑 (10/31, )

 

  이동하는 거리가 멀어서일까 인도의 아침은 늘 일찍 시작된다. 하지만 여긴 서울보다 시간이 3시간 반 늦은 곳. 생태시계는 아직 서울기준이니 새벽에 일어나는 부담이야 전혀 없다.

 

  오늘은 4시 반에 기상했는데 서울기준으로는 8시이니 오히려 늦게 일어난 것. 잠 드는 시간이 늦어지지만 버스 이동시간이 워낙 오래 걸리니 수면시간은 충분하게 마련.

 

  여행 3일차, 오늘은깨달음의 성지, 보드가야로 가는 날. 부처님이 성도한 감동의 그 자리는 꼭 가보고 싶었던 곳. 바라나시에서 갠지즈강 다리 건너 보드가야까지 거리는 250km 좀 넘는데 예상 소요시간은 6시간 이상.

 

 

  '신들의 도시' 바라나시를 나와 '깨달음의 성지' 보드가야로

 

  5시 전에 일어나 일찍 아침식사 마치고, 6시 반 신들의 도시이자 먼지와 소음의 도시바라나시를 빠져 나와 '가장 가고 싶었던 깨달음의 성지' 보드가야로 향한다.

 

갠지즈강 뿌자의식 구경하는 인파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가장 인도다운 도시라는 바라나시난 다시 찾은 이곳에서 삶의 깨달음이나 고독과는 거리가 멀었고, 도시의 매력도 전혀 느끼지 못 했다. 그저 시끄러운 소음과 불결하고 지저분한 거리, 거리를 맴도는 걸인들의 모습만이 머리에 남았을 뿐. 글쟁이들 과도한 수사와는 달리 그냥 잠시 스쳐 지나는 구경꾼으로 바라나시를 떠난다.

 

  "인도스런 모습들이 넘쳐 난다"는 말은 지극히 옳다. "바라나시 가지 않으면 인도에 간 것이 아니다"라는 이 말도 맞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볼 때 그건 찬사가 아니다.

 

 

 

점심 먹으러 간 식당에서 만난 자스민, 인도인들이 정원수로 많이 심는지 여러 군데서 이 꽃을 만났다.  

바람개비 모양의 우아한 흰색 꽃이 그 꽃말처럼 '사랑스럽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흥미롭다. 언제부터인가 잘 꾸며진 유명 관광지보다는 차안에서 더 쉽게 낯선 곳의 '풍광이나 문화의 차이'를 보고 재미를 느끼게 된다. 여기 인도뿐 아니고 동유럽이나 발칸 지역 여행 때는 차창 풍광이 흥미로워 버스 이동시간이 즐겁기까지 했다.

 

 

  인도 국민음료 '짜이'

 

  바라나시 아침, 한낮과는 전혀 딴판으로 한산한 풍경. 그런데 짜이가게는 아침 일찍부터 성업중이다. 짜이 한 잔 들고 담소를 나누거나, 멍 때리거나, 표정들도 가지가지.

 

 

  짜이는 인도인들이 평소 즐겨 마시는 국민음료. 전에 아그라 가는 기차 침대칸에 인도인 모자와 같이 탔는데 아들은 짜이를 여러 잔 마시더라. 근데 이상하다, 기차 안에서도 어머니는 전혀 마시지 않았고, 사진에서 보면 길거리 짜이 마시는 사람은 다 남자. 여자는? 그냥 우연인지 여자는 잘 안 마시는 건지 궁금하네.

 

  짜이는 우유에 찻잎가루를 넣고 생강과 약간의 향신료를 첨가해 만드는데, 이건 영국 식민지 시절 유산. 상업적인 차 재배도 19세기 중반에서야 영국 동인도회사에 의해 도입되었다.

 

  (부처님께 차 공양을 올린다고 하는데, 부처님 당시 인도에는 차 마시는 문화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바라나시 아침 풍경

 

  참고적으로 영국 식민지 지배가 인도를 근대화 시켰거나 잘 살게 만들었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인도인들 짜이 문화나 차 재배 산업 정착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만 얘기하다 보면 꼭 일제강점기 신작로 얘기하면서 사악한 식민지배를 오히려 미화하는 식이 돼 버린다. 일부분이 전체로 왜곡되고, 적의 시각으로 나를 보는 웃기는 오류.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 지배는 수탈과 탄압의 흉악한 범죄일 뿐, 일부 식민지 지배에 부화뇌동 했던 일부 상류층/식자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인도인들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고 인도 경제력도 계속 피폐해지기만 했다. 200년 식민통치 결과 인도는 가장 후진적이고 가난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인도를 수탈해간 영국은 부유해졌고.

 

  그런데 영국 식민지 통치는 야만적인 일본인들에 비하면 아주 양반이었다는 것. 그런데도 일제강점기 근대화 된 일부 부분만을 부각시키며 식민지배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철부지 세력들이 아직도 많은 게 현실. 한일 간 경제전쟁이 벌어지는 그 순간에도 일본 시각을 대변하는 철없는 자들은 자신이 토착왜구라는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을 게다.

 

  해방 직후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 한 우리 사회의 비극이자 몇 백년이 걸려서라도 꼭 해결해야 할 과제.

 

 

  인도 시골 풍경

  어슬렁거리는 앙상하게 마른 소떼들과 쇠똥 반죽을 해 말리는 아낙네들 모습이 여전히 눈길을 끈다. 힌두교에서 신성시하는 소의 역할이야 당분간 안 바뀔 거고, 소를 키우는 건 나름 유용하기도 할 거다.

 

   시바신의 충실한 수행원이자 자가용 난디가 바로 소. 시바신 옆에 항상 소가 같이 있고 난디도 신처럼 존중하게 된 것. 게다 그 소가 주는 우유나 쇠똥이 서민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니 그 자체로도 존중 받아 마땅한 것. 조선시대 농사일에 지장을 줄까봐 소를 함부로 잡지 못 하게 했는데, 여긴 종교적 의미까지 더해졌으니 당분간 인도에서 소가 차지하는 위치는 여간해선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소똥에 밀짚을 섞어 반죽 건조 시키면 냄새도 나지 않고 화력 좋은 땔감이 되니, 집에서 요리할 때 연료로 쓰고 남은 건 시장에서 팔기도 한다. 그런데 그 작업은 주로 여자들이 하더라는 것. 길가 헬렐레 하고 멍 때리거나 노는 건 전부 남자들이더만.

 

  위 사진 보면 시골 오래 된 벽돌집 앞에 건조 중인 쇠똥 반죽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한쪽(오른쪽)에 낡은 옷 입고 갸날프게 마른 여인은 열심히 쇠똥반죽 작업을 하고 있고, 터번 두른 뚱뚱한 사내는 빈둥거리고 있다.

  남녀 역할분담이 철저한 건가, 여성이 노동착취를 당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궁금했다.

 

여긴 부부가 같이 나왔네
시골풍경, 작은 시바사원

 

  보드가야 가기 전, 작은 소도시 시장풍경이 재미있어 차안에서 몇 장 담아 본다. 일단 시장이니 당연히 사람도 많고, 복잡하고, 인도답게 먼지가 많다. 평범한 서민들의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곳.

 

  하긴 우리나라 몇 십년전 시골장날은 더 복잡했을 거다. 파는 물건도 빈약했을 거고, 사는 사람은 더 가난했겠지. 그 시절을 살던 시골 사람들 시장구경이 커다란 유희였던 시기였으니, 지금과는 너무도 달랐지. 인도 시장골목을 보면서 유년기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던 시간.

 

 

 

  비하르주 보드가야로

  

  6시간 넘게 달려 인도 북동부 비하르주 가야구역에 위치한 보드가야 도착. 도로 사정도, 차량 상태도 다 한국과는 달리 열악하기만 하니 이동하는데 시간이 너무 걸린다. 비하르주는 인도에서 가장 못 사는 지역 중 하나라고 한다. 부처님 당시에는 아주 강대국이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시골풍경이 그렇게 여유 있어 보이진 않는다.

 

  

  깨달음의 성지, 감동의 보드가야

  보드가야는 가야라는 지역 명칭에 깨달음의 보드가 붙어 보드가야(깨달음의 가야)가 된 것, 일명 붓다가야. 부처님이 2,500년 성도하신 곳으로 열반경에 기록된 부처님의 4대 성지 중 하나.

 

  부처님이 성도한 자리에 아쇼카왕이 처음 마하보디사원을 세웠고 유네스코는 2002년 보드가야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니련선하와 수자타탑 – 소 치는 마을 처녀 수자타가 올린 수승한 공양

 

  먼저, 부처님이 고행을 끝내기로 했을 때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수자타마을의 수자타탑을 보러 간다. 수자타탑은 나이란자나강(尼連禪河) 건너면 바로 지척. 마하보디사원까지 걸어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깨달음의 성지와 거리가 멀지 않다.

 

  갠지즈강(항하)의 한 지류인 니련선하(Nairanjana)는 물이 없는 강이라는 뜻. 지금은 물이 좀 있는데 건기가 계속 되면 저 물도 말라서 얕은 강이 되겠다

 

 

 

  그냥 평범한 강변 풍경을 보면서도 문득 뭉클하는 감동이 느껴진다. 저 강이 바로 부처님과 깊은 인연을 맺은 곳. 강에서 목욕을 하며 고행의 흔적을 지운 부처님이 수자타의 유미죽 공양을 받고 기운을 차려 니란자라 강을 건너 깨달음의 성지 보드가야 보리수 아래로 걸음을 옮기는 성스러운 장면을 떠올린다.

 

  한걸음 한 걸음, 구도의 긴 여정 속에 저 풍경 하나하나가 깨달음의 과정이었을 거고, 그분의 위대한 깨달음은 지금 내 삶의 큰 부분으로 남았다. 이곳은 꼭 기억하고 싶은 시간들.

 

강가 모래밭, 역시 물이 많지는 않다

 

   붓다에게 올린 수자타의 수승한 공양, 수자타탑

 

  29세에 출가한 고타마 싯다르타는 당시 뛰어난 스승들을 찾아 가르침을 구했으나 그의 구도욕구를 채우지 못 했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자 우루빌라마을의 고행림에서 처절한 고행에 들어간다. 부처님이 히말라야 설산에서 수도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경전 기록으로는 이곳 우루빌라마을에서 고행한 것이 맞다고 한다. 이곳이 당시에는 인도 구도 수행자들의 대표적인 수행처였던 것.

 

  피골이 상접하고 앙상하게 갈비뼈가 드러난 고행상에서 연상되는 6년간의 치열한 수행에도 불구 깨달음을 얻지 못 하자 고행을 마치기로 결심한다.

  고행을 마치고 몸을 회복하기 위해 우선 니련선하에서 목욕을 하는데, 극도로 몸이 쇠약해져 물살에 밀려 밖으로 나오지 못하다가 아사나나무 가지를 붙잡고 간신히 물에서 나와 쓰러지고 만다. 이를 발견한 마을촌장의 딸 수자타가 유미죽을 갖고 와 부처님께 올렸고 이를 받아 마시고 기운을 차린다. 이때 같이 수행하던 다섯 비구는 그 어려운 고행에도 깨달음을 얻지 못 했는데 고행을 포기하고 어찌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고타마는 타락했다며 그를 비난하고 사르나트로 떠난다.

 

  수자타는 얼떨결에 고행으로 지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크나큰 공덕을 세운 것. 수자타는 사람 이름이 아니고 최고의 선을 행한 여성이라는 뜻. 즉 이름이 기록될 정도의 인물이 아니었다는 얘기. 인근에 살던 마을 촌장의 딸로 처녀라고 하기도 하고 아기엄마라고 하기도 하는데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닐 테니까.

 

  유미죽을 드시고 기운을 차린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뤘으니 그 이상 큰 공덕이 어디 있을까?

  부처님은 열반 직전 대장장이 춘다의 공양을 받고 병이 나는데, 춘다를 원망하던 제자들에게 춘다를 감싸며 말한다. “붓다에게 가장 수승한 공양이 두 번 있었다. 하나는 깨달음을 이루기 전 수자타의 공양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춘다의 공양이다라고 수자타의 공양을 높게 평가한 바 있다.

 

수자타탑

 

  후일 수자타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공덕을 기념하기 위해 아쇼카왕(기원전 269~232)이 벽돌로 탑을 세웠고 이후 계속 탑을 증축해 규모가 커진다. 그것이 수자타탑.

 

  수자타탑은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했다고 한다. 지금은 탑 꼭대기에 큰 나무가 자라고 있다. 가이드 얘기로는 10여년 전 왔을 때만 해도 탑 꼭대기까지 걸어서 올라갔었단다. 아마 그 때까지도 이 탑 가치를 재대로 몰랐고 문화재 보호에 대한 인식도 없었을 게다.

 

 

  불법의 수호자, 아쇼카대왕

 

  그러고 보면 아쇼카왕은 법당 부처님 옆에 그의 상을 모시고 매일 감사기도를 드려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전무후무한 불교 수호자이자 전법자이고 부처님 성지를 지킨 공로자. 그가 없었더라면 오늘 날 이렇게 부처님이 수자타가 올린 공양을 드신 장소를 어찌 알 수 있었으며, 심지어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설왕설래 했을 거다.

 

  북인도 최초로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뤘던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대왕(기원전 269~232). 그는 통일과정에 있었던 참혹한 전쟁을 참회하면서 불교에 귀의 하고 불교 성지를 순례하게 된다. 그런데 부처님 입멸 후 몇 백년 되지도 않았는데도 부처님 성지가 이미 가물가물 정확한 위치 확인이 어려웠던 거라. 당시는 기록을 하던 시절이 아니었으니 더 심했겠지.

  놀라고 실망한 아소카왕은 여기저기 부처님의 흔적과 자취를 찾아 고생고생 하며 부처님 성지를 확인하고 성지마다 석주를 세우고 거기에 자세하게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다. 덕분에 부처님 성지 정확한 위치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아쇼카대왕이 아니었으면 부처님이 역사적 인물이 아닌 신화 속 인물이 됐을 지도 모르는 일.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지고 있다가 1,895년 독일 고고학자 휠러가 히말라야 산 기슭에서 땅속에 묻혀 있던 아소카 석주를 발견하면서 확인되고 부처님이 실존했다는 명확한 증거로 삼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인도인들이 그들 땅에서 태어난 부처님 성지를 관리하고 존중했던 게 아니라 아예 석가모니 자체가 오랜 기간 그들 역사에서 지워져 있었던 거라, 그들은 부처님 이름도 몰랐고 불교도 몰랐다. 지금은 돈벌이 좀 하자고, 미얀마라든가 다른 나라에 불교신자 관광객들을 다 뺏기니 관광수입 노리느라 정부에서 겨우 끄집어 낸 정도일 것. 그러고 보니 부처님은 본인이 태어난 고향에서 너무 대접을 못 받으시네.

 

  수자탑 앞에서 가이드한테 부처님이 수행한 전정각산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앞에 보이는 건너편이라고 말한다. 전정각산은 깨달음을 얻기 전에 머물렀던 곳. 아쉽게도 날이 흐려 산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전정각산 방향

  부처님은 전정각산에서 깨달음을 얻고자 했으나 신들이 보드가야 금강좌에서 성도하기를 권해 보드가야로 떠난다. 유영굴은 보드가야로 떠나려는 부처님에게 그곳에서 대각을 이루라고 만류하는 용을 위해 그림자를 남겨 두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

 

  소치는 마을처녀 수자타가 공양한 유미죽을 마시고 기운을 회복한 싯다르타는 강을 건너 보리수 아래에서 선정에 들어 49일만에 깨달음을 이룬다. 이제 그곳으로, 부처님이 깨달으신 감동의 성지, 마하보디대탑(대보리사)으로 갈 차례.

 

니련선하 강변 모습, 강변이 예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