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셋째날 ②] 보드가야 마하보디대탑(마하보디사원), 금강좌와 보리수나무 (10/31, 목)
드디어 깨달음의 성지 ‘마하보디대탑(대보리사)’으로
수자타탑을 보고 다시 강을 건너, 부처님이 피팔라나무(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한 깨달음의 성지 마하보디대탑(대보리사)으로 간다. 부처님 성지 중에서 불자들이 가장 많이 순례하는 곳이고, 가장 큰 감동을 느낀다는 곳.
이곳 '깨달음의 성지' 역시 열반경에 기록된 부처님의 4대 성지 중 하나. 부처님이 입멸을 예고하자 슬퍼하던 아난존자는 “부처님이 그리우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고 묻는다.
그때 부처님이
‘자신이 태어난 곳(룸비니동산), 깨달은 곳(보드가야), 처음 전법을 한 곳(사르나트), 입멸한 곳(쿠시나가르)’ 4군데를 불자들이 친견해야 하는 곳으로 알려 준다. 그곳이 바로 부처님의 4대 성지.
수자타의 공양을 받고 기력을 회복한 부처님은 마른 강을 건너 우루빌라 마을에서 2~3km 떨어진 보리수 나무 아래 금강좌에서 선정에 들었고, 드디어 위 없는 깨달음을 이룬다. 깨달음의 성지 그곳에 세운 스투파가 바로 마하보디대탑(대보리사).
그 감동의 성지로 가는 설레는 길.
대보리사, 대탑입구 광장에서 바로 입장하지 못 하고 신발 보관부터 해야 한다. 여긴 신발을 벗고 맨발로 들어가야 하는 곳. 맨발로 걷기 찝찝한 사람은 양말이나 덧버선 지참하는 것도 좋은 방법. 전에 인도 여행 왔을 때 다른 사원 들어갈 때도 맨발로 들어갔던 경험이 있어, 이번에는 낡은 양말을 여러 켤레 갖고 와 한번 신고는 바로 버렸다.
여기도 사르나트박물관처럼 핸드폰은 갖고 들어가지 못 한다고 해 차 안에 두고 내렸다. 카메라는 2불 지불하면 소지 가능. 즉 인도 성지순례 가려면 카메라 하나는 갖고 가는 게 좋겠다.
그런데 신발 보관하는 곳이 따로 없는지 가이드는 염주나 작은 불상 같은 기념품 파는 상점 옆 골목으로 우리 일행을 안내한다. 골목 한쪽에 신발을 벗어두고 맨발로 대보리사로 들어 가는 것,
깨달음의 성지, 마하보디대탑, 금강좌와 보리수나무
수행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우루벨라 마을 고행림을 떠나 보리수 나무 아래 길상초를 깔고 동쪽을 향해 앉아 “깨닫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대결정심(大決定心)으로 선정에 든다. 그리고 선정에 든 지 49일 만인 음력 12월 8일 새벽, 위 없는 큰 깨달음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얻어 부처님이 된다.
경전은 붓다의 깨닫는 과정을 소상하게 묘사하고 있다. 금강좌에 앉아 선정에 든 부처님이 성불하지 못 하도록 욕계 마왕은 자신의 세 딸을 보내 유혹하게 하는 등 갖은 방해를 다 하나 결국 실패하고 만다. 벌거벗은 세 여인이 부처님을 유혹하는 그림이 바로 이때 깨달음 직전 상황을 묘사한 것. 이런 일화도 그 깨달음의 과정이라는 상징이 아닐까.
그리고 부처님의 성불은 단순히 금생의 수행 결과가 아니라 오랜 기간 수 없이 많은 생애를 겪으며 구도에 대한 열망이 이어져 가능했다는 것. 그래서 불자는 반드시 성불하겠다는 서원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고, 그 기도와 수행이 이어져야 한다. 예불하고 삼보께 귀의하는 것도 이 땅에 나투신 부처님의 생애에 감사하면서 구도를 향한 발심이 지속되게 하는 것.
산스크리트어 ‘붓다’는 '깨달은 이, 진리에 눈뜬 이’라는 뜻이며, 우리말의 부처님도 이 ‘붓다’라는 말에서 온 것. 부처님은 여래십호라 해서 여래의 공덕을 표현하는 10가지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 여래십호(如來十號):
여래(如來) - 진여(진리)로부터 오신 이
응공(應供) - 마땅히 인간과 천신의 공양을 받을만한 이
정변지(正偏知) - 일체 법을 두루 올바르게 아는 이
명행족(明行足) - 몸과 발, 생각이 다 원만하게 갖추어진 이
선서(善逝) - 미혹을 넘어 깨달음의 세계로 잘 가신 이
세간해(世間解) - 세간을 잘 아시는 이
무상사(無上士) - 위없이 가장 높으신 이
조어장부(調御丈夫) - 사람들을 올바르게 열반으로 인도하는 이
천인사(天人師) - 하늘과 인간의 스승
불세존(佛世尊) - 깨달음과 덕으로 세간에서 존중을 받는 이
부처님이 깨달은 자리에 세운 대보리사
보리수 아래 그 깨달음의 자리에 세운 사원이 마하보디사원 즉 대보리사. ‘마하’는 큰, ‘보디’는 보리, 깨달음, 진리의 뜻. 즉 큰 깨달음이라는 의미의 대각사. 대보리사는 기원전 254년 아쇼카왕이 부처님의 성도를 기념해 부처님이 깨달은 금강좌 위에 처음 세웠다고 한다.
현재 사원은 5~6세기 후기 굽타시대 건립된 사원으로 보존된 초기 불교사원 중 하나. 12세기 인도를 침입한 이슬람 세력에 의해 불교사원이 파괴되고 탄압을 받으면서, 신자들은 마하보디사원을 보존하기 위해 높이 54m 대탑 전체를 흙으로 덮어 감추었다고 한다.
이후 1883년 영국인 커닝햄에 의해 발굴되어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고, 미얀마 불교도들의 대대적인 복구작업으로 현재와 같은 외형을 갖추게 된다. 미얀마인들이 복구작업을 할 때 바간에 있는 마하보디 사원을 참고로 하여 복구했다고 한다.
* 주변 불교국들은 과거에 보드가야 마하보디사원을 모델로 사원을 세우고 마하보디라는 이름을 붙였으므로, 가까운 미얀마의 바간 마하보디 사원 형태가 바로 원래의 마하보디사원 형태와 가장 가까웠던 것.
장엄한 마하보디사원(대보리사)에 들어서며
보안구역 검색대를 통과해 사원구역 안으로 들어서니 바로 앞에 장엄한 마하보디대탑(사원)과 그 주변을 둘러싼 종 모양의 봉헌탑들, 그리고 수많은 참배객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드디어 깨달음의 성지 그 한가운데 들어 선 것.
가슴이 콩닥콩닥 할 정도야 물론 아니지만 그래도 설렌다. 저기 마하보디대탑(대보리사) 정말 보고 싶었으니까.
대보리사는 탑형 사원으로 탑이자 사원. 탑 내부에 법당이 있고 그곳에 불상을 모신 형태. 사각형 기단 위 한 가운데 높이 54m의 중앙탑이 있고 네 모퉁이에 작은 탑을 세웠다. 5개의 탑이 하나의 기초 위에 서 있는 형태. 그동안 봐 왔던 봉분 형태의 탑이 아니라 탑의 형상이 기품있게 장엄하면서도 아름답다.
중앙탑은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을 상징하고 네 모퉁이 작은 탑은 사주를 상징한다. 부처님이 계신 곳이기에 우주의 중심이며 가장 신령스런 곳 그곳이 바로 수미산인 것.
이곳 깨달음의 성지 대보리사는 전 세계 불교도들에게 이곳이 가장 의미 있고 아름다운 사원이 아닐까? 대탑을 보면서 몸 전체로 느껴지던 그 감동의 순간은 아마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 인도에 오면서 망설였던 분별도 다 잊어 버렸고,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에 한없이 감사했다.
'깨달은 자리를 친견할 수 있었던 이 인연에 감사 드립니다.'
계단을 내려가니 사원 정문 좌우로는 관세음보살과 미륵보살 상이 모셔져 있다. 긴 줄을 기다려 사원 내부로 들어가 참배, 안에 모신 부처님은 기원후 6세기 경 조성된 불상으로 황금색 가사를 걸친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한 성도상.
항마촉지인은 마귀를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어 땅의 신에게 깨달음을 알려준 표현. (선정인, 초전법륜인, 오른 손을 든 시무외인 등이 대표적인 수인) 우리나라 석굴암 본존불은 바로 이곳에 있던 성도상을 본떠 조성했다고 한다.
아쇼카왕이 부처님이 깨달으신 이곳 금강좌에 보리대탑을 세웠으니 불상이 자리한 곳이 바로 붓다가 깨달은 금강좌이며 우주의 중심.
“깨닫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대결정심(大決定心)으로 선정에 들었던 그 감동의 자리에서, 축축한 바닥에 엎드려 삼배를 올리며 기도했다.
“삼보께 귀의합니다. 오늘의 인연으로 저도 언젠가 성불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깨달음의 감동 보리수와 금강좌
대탑에서 나와 이제 깨달음의 나무 보리수를 보러 간다. 대탑을 따라 가는데 벽면과 첨탑에는 감실을 만들어 불상을 조각해 모셔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외벽 불보살 상은 주로 8~9세기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도 땅에서 불교가 쇠퇴하긴 했어도 미얀마 등 인근 불교 국가 신자들의 순례가 계속 되었기에 가능했던 것.
대탑 뒤편으로 가니 부처님이 그 나무 아래서 성도한 25m 높이의 보리수 나무가 있다. 유미죽을 마시고 기력을 회복한 싯다르타는 인근 농부가 준 길상초 다발로 자리를 만들어 피팔라나무 아래에서 선정에 들어간다.
깨달음을 얻지 못 하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겠다는 각오로 선정에 들어간 그는 49일째 되는 날 새벽 샛별을 보는 순간 대각(大覺)을 이루고 부처님이 된다. 부처님이 피팔라나무 아래에서 성도 했기 때문에 깨달음의 나무, 보리수라 불리게 된 것.
보리수를 보호하기 위해 돌 난간을 만들고 난간 안 깨달음의 장소에 금강보좌를 만들어 놓았다. 그 아래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이 첫발을 내딛은 자리에 부처님 발자국을 새겨 놓은 불족석이 있다.
그러나 아소카 대왕이 부처님이 깨달은 자리에 탑을 세웠으니 마하보디사원 중앙이 깨달음의 장소일 것이고 눈에 보이는 금강좌는 신자들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만든 것일 것.
이 보리수도 경배의 대상을 없애기 위한 훼손으로 여러 번 수난을 겪는다. 부처님 당시 원래 보리수는 이교도들의 박해로 사라졌고 이후 다시 심은 것.
기원전 3세기 아소카 대왕의 아들과 딸이 전법을 위해 스리랑카로 가면서 딸인 상가미타가 성지 보리수나무 가지를 갖고 가 지금의 스리랑카 아누라 다프라사원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그 보리수가 현존하는 보리수 나무 중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이며, 19세기 그 보리수 나무에서 묘목을 구해 마하보디 사원 깨달음의 자리에 다시 심었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의 보리수나무는 원래 보리수의 손주 뻘 되는 것.
* 2014년 인도 환경산림부에서 우리나라 산림청에 기증한 보리수 묘목이 바로 이곳 보드가야 보리수 씨앗을 발아시킨 것. 그 묘목은 광릉 국립수목원에 심어 관리하고 있다고 발표.
보리수 나무 주변은 기도하고 정진하는 신자들로 만석. 신자들이 가장 많이 모이고 경배하는 곳이 이 보리수나무 아래가 아닐까 싶다. 단체로 모여 앉아 독경이나 염불 정진하는 사람들, 명상하는 사람들, 그리고 돌 난간에 머리를 대고 기도하는 사람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부처님을 경배하고 신앙을 표현한다. 그들 진지한 모습에서 오랜만에 어린시절 순수했던 열망과 신앙을 떠올린다.
‘불법승 삼보께 귀의합니다’
부처님의 7선처(七禪處), 성도의 기쁨을 누렸던 곳
금강대좌와 보리수나무 참배를 마치고, 다음으로는 부처님의 7선처(七禪處)를 돌아본다.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한 부처님은 7일마다 자리를 옮겨 가면서 보리수 주변에서 7주 동안 머물렀는데, 그 때 부처님이 매주 머물렀던 일곱 개의 작은 성지, 그곳이 바로 7선처(七禪處). 부처님은 7주간 선정에 들어 자신의 깨달음을 반조하고 깨달음의 기쁨을 누렸던 것.
보리수에서 탑을 살짝 돌아나오니 3주차 머물렀던 제3선정처 경행처. 부처님이 내딛은 발자국마다 대좌를 만들어 놓았고 꽃으로 장식했다. 부처님의 몸에서 오색광명이 피어 올랐던 4주차 라트나가르 사원, 깨달음의 자리를 만들어주 고마운 보리수를 지켜봤던 제2선정처 정안스투파,
지금은 반얀트리 나무 대신 돌기둥이 서 있는 5주차 반얀트리 선정처를 본 다음 잠시 걸으니 아소카석주. 여기 아소카석주 위에 동전을 던져 올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단다. 흐미, 근데 석주가 제법 높아서 소원 이루기 쉽지 않겠다.
아소카석주를 지나 무찰린다 연못으로 간다. 이곳은 6주차에 부처님이 머물렀던 곳인데 Naga 용이 부처님을 보호하고 있다. 근데 조형물 보니 용이 아니라 킹코브라 같다.
실제 무칠린다 연못은 경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 연못은 생활쓰레기 범벅으로 오염되어 있어 순례할 상황이 안 된단다. 그래서 그냥 대보리사에 가까운 연못을 제6 선정처 무찰린다 연못이라고 하나 보다.
마지막으로 제7 선정처 라자야타나 나무. 부처님은 이곳에 머물면서 교진여등 다섯 비구에게 자신이 깨달은 법을 설하기로 결심하고, 다섯 비구가 머물고 있는 사르나트(녹야원)으로 간다. 붓다의 위대한 전법여행 첫 발자국이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된 것.
제7 선정처에는 인도스님들이 단체로 모여 있다. 노란색 주황색 주홍색 여러 색 승복을 입고 있고 일부는 우측 어깨를 드러내는 복장. 옛날 인도 수행자들이 전법하러 중국에 처음 갔을 때 저 어깨 드러내는 노출 복장에 중국인들이 질겁했다는 것. 그런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 불교는 동아시아에 굳게 뿌리를 내리게 된다.
탑 주변에는 오랜 세월 신자들이 정성을 다해 모신 봉헌탑들이 있고 그 사이 사이 신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수행과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깨달음의 성지에 머물러 정진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사실 많이 부러웠다.
장엄한 마하보디대탑과 7선처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왔다. 너무 빨리 휘 돌아보는 것 같아 아쉽긴 하지만 내일 이곳에서 영산재가 있으니 다시 참배하고 돌아볼 수 있을 것.
성스러운 깨달음의 성지에서 조금 더 머물면서 그분의 깨달음이 다시 내 마음에 울림이 되기를, 오래 잊고 살았던 열망이 다시 피어 오르기를 소망해 본다.
깨달음의 성지 순례로 깊은 감동을 안고 돌아가는 길. 그런데 다음 순서는 골목에 벗어둔 신발 찾으러 가는 것, 성스러운 세계에서 다시 세속의 세계로 가는 느낌. 그건 신발 보관했던 골목 옆에 있는 기념품점에서 나름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
신발 보관을 이 골목으로 안내했던 이유가 우선은 신발 보관장소가 필요 했고, 추가로 바로 이 기념품점에서 물건을 사게 하고 싶었던 것. 여기는 믿을 수 있는 곳이라나 뭐라 하면서 일행을 끌고 기념품점에 들어갔는데 옆에서 보니 역시 신심이 깊은 신자들이라 매상이 제법 쏠쏠 했을 것 같다. 나야 기념품에는 원래 관심이 없었으니 코끼리 머리를 한 힌두교 가네샤 신상만 신기해서 구경하다 나왔고.
참고로 가네샤 신은 부와 상업의 신이라 인기가 좋은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가네샤신은 시바신과 부인 파르바티 사이에서 태어난 2명의 아들 중 하나(다른 아들은 전쟁의 신인 까르띠께야)로 머리가 코끼리 모습이며 쥐를 타고 다닌다. 시바신이 아들 목을 잘라 놓고 대신 코끼리 목을 붙여 놓는 바람에 그리 된 것.
그런데 오후부터 배가 살살 아프더니 설사를 하려고 해 참느라 꽤나 고생했다. 빨리 호텔로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기념품점에서 한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렇다고 짜증까지 나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빨리 갔으면 싶었다, 그것도 간절하게. 그나마 내일은 장거리 버스 타지 않는 일정이라 다행이네.
그룹별로 오토릭샤 타고 호텔로 돌아가 저녁 먹고 휴식. 오늘은 성지의 감동과 육신의 고달픔이 교차된 날. 10월의 마지막 밤을 그렇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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